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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 16

최민식 형님의 안테나형 헬멧 머리. 이거 하나로 거의 50만명.

또, <JSA>에서 대박 한 번 제대로 치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하고 싶은거 한 번 제대로 한, 다름아닌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거의 40만명.

그리고, 사람을 잡아다가 이유도 안 가르쳐주고 15년 동안 가둬논 미친者가, 뺀들뺀들 멀쩡하게 정장 차려입은 유지태라는 점도 거의 20만명.

도합 약 관객 110만명은 일단 먹고 들어간 <올드보이>.

이 영화가 올해 하반기에 가장 기대되는 한국영화라고 일컬어지는 건 심히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항상 관건은,

그 다음부터다.

••

일단, 오프닝 크레딧.

어떻게 하면 기존 오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만을 고민하는 작금의 예고편계의 풍토와 달리, 나름대로 훌륭한 절제미를 보여주었던 예고편의 자막(좀 있어보이는 필루다가는 '모션타입motion type'이라고도 한다만..)을 계승한 당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아마도 지금까지 필자가 본 한국 영화 중 최고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이 오프닝의 마지막에 떠오른 영화 타이틀은, 발자욱 소리/시계소리와 멋지게 맞아 떨어지면서 코오...하는 단말마의 절로 쥐어짜게 만들었고 말이지.

마치 잡스러움이라는 컨셉을 형상화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필생의 본분인 양, 쌈마이적 광택을 번득이며 채석장 발파작업을 능가하는 쿠궁 효과음과 함께 스크린 가득 들이박히는 CG 타이틀들과 비교하자면 이건 거의 나이키 앞의 까발로라 하겠다.

하지만 항상 관건은,

그 다음이다.

••

그 크레딧에 이어지는 것은, 최민식 형님의 연기력 퍼레이드다.

술 취한 보통 월급쟁이,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곳에 갇히게 된 그 월급쟁이, 그리고 15년 동안 거기에 갇힌 덕분에 이미 월급쟁이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월급쟁이의 연기까지, 최민식 형님의 연기는 15년이라는, 없던 시간마저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연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와 연기 정말 오방이다'라는 감탄사를 토하게 만듦으로써 약간은 안타까운 면을 남겼더랬다. 모름지기 최고의 연기라 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저 사람 연기 잘한다' 또는 ‘사람은 연기자다'라는 생각조차도 못하게 하는 그런 연기가 아니던가 말이다.

어쩌면 이는, '드라마도 음악도 색채도 넘쳐나는 과잉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의도에 일부러 맞춘 연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거였다면, 그건 역시 대단한거고.

어쨌든, 그 감금의 15년, 그리고 석방 직후까지의 전반부는, 골때리는 나레이션과 함께 어우러지는 최민식 형님의 탁월한 연기는, 극장문을 들어설때의 기대를 헛되지 않게 해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관건은 항상 그 다음이다.

••

도대체..

'그 다음'에 뭐가 나오길래 그러냐구?

안타깝지만 그건 말하기 상당히 곤난하다.

실컷 얘기해놓고 뭐 하자는 플레이냐구?

그 짱나시는 심정 십분 이해가 간다만, 할 수 없다.

그런거 함부로 얘기하는거 아니랜다.

이 영화에 참여한 스탭들은 이 영화 결론에 대해서 발설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된다는 계약서를 썼을 정도라던데, 일개 관객 나부랭이인 필자가 그런거 잘못 얘기했다가는 무슨 어택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더냐.

나 돈 그렇게 안많다.

••

하지만, 이런거 정도는 얘기할 수 있겠다.

예전에도 <장화홍련> 얘기하면서 그런 얘기 한 번 했었더랬다만, 사실 <올드보이>가 핵심 컨셉으로 밀어주고 있는 그 '반전'이라는게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도 안 반전스럽다는 거 말이다. 박찬욱 감독 정도면 그런 진부해터진 유행같은건 무시해버릴법도 하다고 믿었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긴 뭐, 박찬욱 감독 영화라구 유행 따라가지 말라는 법 있나. 그럼 좀 어때.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역시 설득력이다. 그 엄청나다는 '비밀'의 핵심에 본격적으로 접근해가는 영화의 중반 이후가, 그닥 재밌다거나 관객을 휘어 잡는다거나 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왜 나를 15년 동안이나 가뒀냐?'라는 의혹을 푸는 거 하나에 모든 촛점이 맞춰져있는 영화이므로, 최민식 형님이 의혹의 중심에 점점 가까와지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더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지는게 맞을게다. 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안타깝게도.

게다가 막판에 밝혀지는 '비밀'이라는 것이 그다지 대단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나름대로 기발하기도 하고 머리 많이 굴려서 짜놓은 스토리라는 건 알겠는데, 그것 이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안온다는 것이다.

••

또한, 그 기발하다는 스토리 자체도, 사실 알고보면 그닥 치밀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상당히 어거지스러운 쪽에 가깝다. 왜냐.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미 100년전에 발표된, 추리소설의 헌법이라 할만한 '녹스의 10계' 중 한 항목, 즉 "범죄나 그 범죄의 해결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항목을 완전히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 어기고 있냐구? 더 이상 상세히는 얘기 안하겠다.

'최면술' 뭐 그런걸 핵심 컨셉으로 써먹었다는 얘기했다간, 위약금 내야 할지도 모르잖어.

어쨌거나 뒷부분의 '반전'이나 '비밀'은 앞부분의 참신함과 재미에 비해,

별루다.

상당히 별루다.

그리하여,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오바와 안오바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도한 스타일과, <복수는 나의 것>의 필을 그대로 계승한 쳡쳡쳡쪅쪅떡떡떡 피칠갑 사운드, 그리고 그 외 기타 등등의 요소들에 의해 발생된 복합적 스트레스의 무거운 기운만이 오랫동안 극장 가득 들어차 있었을 뿐...

결국, 그 스트레스로 땡기는 뒷골을 지압하면서 극장문을 나서던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