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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후>는 오랜만에 본 '제대로 된' 영화였다.

여기에서 '제대로 된 영화'란, 수려하고 능란한 미쟝-센을 바탕으로 의미심장한 메타포를 담지한 씨네아스트의 영상언어를 쉬르리얼리스틱하게 형상화 한 포스트모더니스틱 아-트 시네마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딴거 아닌건 물론 아실꺼고.

필자가 말하는 '제대로 된 영화'란, 드넓은 도량과 깊은 헤아림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이해해주어야만 간신히 납득할 수 있는 영화들, 또 그래야만 본전을 뽑아낼 수 있는 영화가 아닌 모든 영화를 말함이다.

재미 뭐 그런걸 떠나서, 이런 영화를 보면 일단 돈은 아깝지 않다.

<28일후> 역시 그랬다.

이 영화, 모든 좀비영화들이 그렇듯, 아슬아슬하고도 숨막히는데다가 암담암울하기까지 한 영화 -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스트레스 받는 영화' - 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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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충격적'이라던 2개의 결말까지 마지막 닭뼈 빨듯 싸그리 챙겨보고 극장을 나서는데, 퍼뜩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거 뭔가하구 비슷한데...'

그렇다. 언뜻보기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영화와 꽤 공통점이 많은 영화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그것이 그 영화의 제목이었다.

그렇다. 그 <블레이드 러너> 맞다.

일단 두 영화는 기본적으로, 폐허에 가까운 도시를 배경으로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끝까지 유지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또,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 구성된 팀이 생존을 위해서 뭉친다는 기본 설정 또한 서로 닮았다. (<28일후> : 짐, 쎌리나, 프랭크, 해나 <블레이드 러너> : 로이, 프리츠, 레온, 조라)

<28일후>

<블레이드 러너>

그 공통점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 농후해지는데, 후반부에서 웃짱을 까고 건물을 이리저리 뛰어댕기면서 적들을 하나씩 보내버리는 주인공 짐의 모습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데커드와 마지막 대결을 하던 로이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다.

<28일후>

<블레이드 러너>

두 장면이, 번개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비슷함을 더욱 강력하게 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닮은 점은 바로 '두가지 결말' 부분이다.

여기서 잠깐.

주최측의 주장과는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충격적이라거나, 엄청난 반전을 숨기고 있다거나 하지 않는다. 해서, 결말에 대해서 살살 언급하는 정도는 큰 지장 없으리라고 보고 얘기 계속하겠다.

물론, 결말 같은거 코딱지만큼도 절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 보고 싶으신 분은, 이 대목에서 위의 빠꾸 버튼을 가볍게 눌러주시면 되겠고.

다들 '두가지 결말'이라하면, 뭔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선 주인공이 A라는 선택을 하는 경우와 B라는 선택을 하는 경우에 따른 두가지 결말, 뭐 이런걸 떠올리실꺼다.

하지만, 그런거 절대 아니다.

<28일후>의 '두가지 결말'이란 다름아닌, 해피엔딩과 안해피 엔딩 두 버전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건 '두가지 결말'이라고 하기보다는 '두가지 엔딩'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말일 것이다. 물론, '엔딩'이 아닌 '결말'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주최측에서 의도적으로 쓴 작전용 어휘였겠지만. 어쨌든,

<28일후>의 해피엔딩은, 초원위를 나는 비행기의 공중촬영 장면이 나온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와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고도 난데없는 목가적 분위기 물씬 풍긴다는 점까지, <블레이드 러너> 극장판의 엔딩과 상당히 닮아있다.

<28일후>의 안해피 엔딩도 마찬가지다. 특히 주인공급 두 명의 모습이 빼끔히 열린 문틈으로 사라지는 맨 마지막 장면은, <블레이드 러너> 감독판의 마지막 장면, 즉 엘리베이터 문 닫히는 장면과 상당히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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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막은 모리겠으나, 이렇게 두가지 엔딩이 나오게 된 배경도 <블레이드 러너>와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지 않을까 싶다.

돈 대주는 입장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아실아실하고 숨 턱턱 막히는 어두운 분위기였던 영화가 마무리 마저 안해피하게 돼 버리는 걸 좋아했을리 없다.

또한, 만드는 입장에선, 뜬금없이 앞 뒤도 없이, 지금까지 하던 얘기 헤까닥 뒤집고 '그리하여,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시금 밝고 맑고 아름다운 세계로 돌아갔도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리 없다.

그리하여, 이들이 만나게 된 절충점이 바로 '두개의 엔딩'이라는 해결이었을 것이다.

두쪽 다 하고 싶은 얘기 다하는데다가, '두개의 결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화제성 또한 있어 관객의 주목을 끌 여지도 더 있다. 어허.. 머리들 좋아.

확실히, 감독 얘기같은건 싹 무시하고, 구질구질한 나레이션 집어넣고 말도 안되는 결말 때려박은 '극장판'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됐던 22년전의 이판사판적인 분위기보다는 훨씬 나아진 듯 하다.

근데,

이 대목에서 갑자기 생각나는 영화가 또 하나 있다.

감독이 리들리 스콧과 공통점 허벌 많다고, 처음부터 보도자료에서부터 톡까놓고 주장하고 들어갔던 영화,

아, 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물음표가
상당히 애처롭구나..

인조인간을 처단해야하는 주인공이 인조인간을 사랑한다는 기본설정부터가 <블레이드 러너>와 완전 같은 영화,

바로 <내추럴 시티>다.

이 영화를 보면, '참고'나 '존경'이 그 수위를 넘어서서 '모방'으로 발전됐을때, 어떤 재난이 야기되는지는 이 영화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한국의 SF 영화, 또는 SF 애니메이션 지망생들이여.

이제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 기동대>, <에일리언> 같은 영화들 '참고'는 그만 좀 하자. SF 영화 만들고 싶다고 SF만 줄창 보지말고, 애니메이션 만들고 싶다고 애니메이션만 줄창 보고 그러지는 말자는 얘기다. 맨날 그것만 줄창 들여다 보고, 분석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뭔가 제대로 된게 나오는거 아니니까 말이다.

빗자루질 3년하던 성룡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공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취권>의 뜻깊은 가르침을 되새겨보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쫒을땐, 끝없는 흉내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