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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인트로가 좋아

2007 4. 5 

 

나는 비교적 인트로를 미칠듯이 좋아하는 편이다.

근데,

대체 뭔 인트로. 각종에브리 인트로?

그건 물론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인트로들은 주로 책, 음악, 영화의 인트로들인데,

아니 그거면 대략 각종에브리 인트로가 되는 거 아니냐구. 뭐 그럴수도 있고.

여튼.

오늘 아침에 별 생각없이 책방에 잠깐 들렀더랬는데, 아글쎄 새로 나온 마르케즈의 자서전이 뭉텡이로 쌓여있는 것이었다.

0.1초도 생각치 아니하고 냅다 집어든 이 책에는, 아니나 다를까, 과연 마르께즈다운 멋진 인트로가 적혀있어 아침부터 필자를 감동시키고 그랬더랬는데, 그 내용인즉슨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다.


코오....

물론 맨 끝에 붙어있는 저 똥꼬형 별표가 없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그 정도야 얼마든지 넘어가 줄 수 있다고 한다면,

한낮의 운동장처럼 넓디 넓은 페이지에, 덜렁 몇 글자만이 적혀있는 그 한가로우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비주얼,

그리고 모든 것들을 졸여놓은 듯한 '덜렁 몇 글자'들이 주는 짜릿함이야말로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순간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인트로(또는 헌사) 중에는 시덥잖은 치기만 엿보이는 것들도 있기도 하다만, 대체로 좋은 작가들인 경우 인트로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다.

* * *

영화의 경우엔 대체로, 인트로(오프닝 크레딧)가 있는듯 없는듯 할수록 훌륭한 영화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인트로가 요란뻑쩍지근할수록 영화 자체는 도저히 눈뜨고 못봐줄 경우가 허다하고 말이다.

근데, 그렇게 본다면, 현존하는 영화 인트로 중 최고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뭘 물어. 단연 우디 앨런 영화의 인트로들이지.

시꺼먼 화면,

거기에 박힌 하얀 글자,

그리고 그 뒤로 깔리는 골동품 재즈.

덜러덩 이 세 개만으로 만든 그의 인트로들을 그 뉘라 이길 수 있을 쏜가.



아,

넓고 한적한 극장에서 우디 앨런의 신작을 보고 싶은 계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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