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2
2007 3. 25
책 느리게 읽기 분야라면 국내 랭킹 20위 내에 충분히 들 수 있을 거라 자부하는 필자가, 챈들러의 장편 중 가장 긴 <기나긴 이별>을 불과 2주 만에 다 읽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물론, 평소 챈들러 소설답지 않게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그닥 안 길고, 별로 안 헷갈린다는 편의성을 갖춘 덕분이겠는데,
난 다른 작품들 읽을 때도 전혀 안 헷갈렸더랬다구. 그렇다면 이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쪽에 도전해보시라. 여튼.
책 말미에 보너스로 붙어 있던 챈들러 선생의 한 마디가 필자의 심금을 즉각적으로 울리었으니, 이 자리에 적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는데 그것이 계속 모방되고 심지어 표절하는 사람까지 있을 때, 나 자신이 마치 나를 흉내내는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하지요. 위험은 독자들도 따라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독자들마저도 따라올 수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쨌든 가야만 했던 그의 심정을 상상해 보던 중, 이런 걸 느꼈다.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아침 안개 낀 삼나무 숲을 고요히 산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스모그와 땀 냄새로 가득 찬 쓰레기 더미 사이를 헤집고 나가는 쪽에 가깝다는 걸,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그 쓰레기 더미에서 한 가닥 빛이 새어나올 때, 그건 그 어떤 삼나무 숲으로 떨어지는 아침 햇빛보다도 아름답다는 걸 말이다.
그 빛이 단지 세상이 쓰레기 더미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보려는 사람이 피우는 담뱃불에 불과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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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그런 곳이 과연 있기나 했던 걸까.
아니, 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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