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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2006년의 영화들

2006 12. 21

 

..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아래는 지난 주 영화주간지 씨某 잡지로부터 마감 12시간 전 요청을 받고 헐레벌떡 골라본 소위 '올해의 영화'들이다.

사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무슨 회계법인도 아닌 것이 '연말결산' 뭐 이래감서 뭔가에 순위를 매기고 베스트를 뽑고 등등 하는 것엔 거의 흥미 없음이다만, 그래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을 때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여튼, 이 씨某 잡지가 워낙에 지면을 가벼이 허락치 아니하는 매체인지라, 잡지에는 실리지 못했던 몇 가지 설명(또는 변명)도 함께 덧붙인다.

* *

1. 올해의 영화인

올해의 감독 : 심형래

선정근거: 무려 8년째 공백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이 정도의 높은 관심과 기대를 유지시켜낼 수 있는 감독이 또 있는가. 있다면 조지 루카스 정도.

올해의 남자 배우 : 한석규

선정근거: 그러던 배우가 이러기란, 모르긴 몰라도 결코 쉬운 건 아닐게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모두 좋아한 건 아니지만, 그의 선택은 모두 이유 있어 보인다.

올해의 여자 배우 : 천둥이(<각설탕> 주연마)

선정근거: 말이 구슬피 울기까지 한다. 심지어.

올해의 제작자 : 모르겠음(알게 뭔가)

올해의 시나리오 : 낸시 메이어스(<로맨틱 홀리데이>)

선정근거: 매력적인 캐릭터, 세련된 대사, 영리한 상황설정, 그리고 이것들을 부드럽게 품어주는 따뜻한 배려가 있는 노련한 시나리오.

올해의 신인 남자 배우 : 모르겠음(누가 신인인지 분간 전혀 안감)

올해의 신인 여자 배우: 우에노 주리 (근데 얘 신인 맞나...?)

선정근거: 그녀의 색소폰 연주는 올해 최고의 스턴트였다. 더구나 얘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걔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올해의 신인 감독 : 김태용

선정근거: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를 만든 감독이므로 당연히.


2. 한국영화 베스트 5

아마도 수집된 정보를 근거로 미루어보건데 <천하장사 마돈나> 역시 강력한 우승 후보일 것 같으나, 필자가 아직까지도(그렇다. 아직까지도 말이다) 이 영화를 못 본 관계루다가, 부득이 누락시켰음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아, 게으름의 끝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1위 : <가족의 탄생>

선정 근거 : 현실과 판타지, 상처와 구원, 풋내와 연륜, 과거와 현재, 추함과 아름다움, 기교와 담백, 이 모든 것들의 무게중심 위에 있는 영화.

2위 : <라디오 스타>

선정 근거 : 아따, 그냥 시원허니 좋다. 대체 왜들 되도않게 뒤집고 꺾고 섞고 꼬고 그러는건데.

3위 : <달콤, 살벌한 연인>

선정 근거 : 3분이면 끝날 것 같은 얘기를 두 시간 동안, 그것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하는 놀라운 재주.

4위 : 없음

5위 : <괴물>

선정 근거 : 모두들 흐릿하게 그리고만 있던 한국산 SF의 그림을 가장 뚜렷하게 출력해낸 결과물.


3. 외국영화 베스트 5

씨某 잡지에서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는 104편, 외국영화는 232편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하루에 한 번 꼴로 영화가 개봉됐단 얘기지.

당연히 안이와 나태를 인생의 새로운 모토로 삼아볼까 진지하게 함 생각해보고 있는 필자가, 이 영화들을 몽조리 봤을리는 만무한 것. 특히나 외국산 영화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본 영화가 없었음을 밝히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본' 영화들 중의 순위는 대략 이렇게 나왔다.

1위 : <브로크백 마운틴>

선정 근거 : 내가 안구 건조증에 걸리지 않았음을 거의 3년만에 증명해준 영화.

2위 : <로맨틱 홀리데이>

선정 근거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로도 얼마든지 충분했던 낸시 메이어스의 재능은, 놀랍게도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공동 3위 : <BB 프로젝트>

선정 근거 : 유쾌하기 짝이 없는 액션을 보다가 자칫 망각해버리기 쉬운, 성룡 형님의 연세를 다시 한 번 상기하라.

공동 3위 : <커피와 담배>

선정 근거 : 짐 자무쉬의 영화 중, <고스트 독> 다음으로 좋은 영화. 다들, 뭔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흠.

공동 3위 : <스윙걸즈>

선정 근거 : 이렇게 유쾌하게 천진난만할 수 있는 자,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4. 올해, 나만의 Guilty Pleasure

보기에도 대단히 생소한 이 'Guilty Pleasure'라는 잉그리.. 대체 그 뜻은 무엇인가.

주최측에서 보내온 설명을 그대로 적자면 아래와 같다.

"올해의 한국영화, 외국영화 중 유독 본인을 사로잡았던 영화를 적어주십시오. 여러가지 경우가 있겠으나, 일반적인 평가가 부당하거나 지엽적인 이유 때문에 개인적인 애정을 유발시킨 영화 등이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디가서 좋다고 칭찬하면 쪽팔리거나 각 안잡히거나 심지어는 돌 맞을 영화를 함 까놓고 얘기해보자는 얘긴데...

그렇게 따진다면 필자가 뽑은 영화들은 대부분 이 범주에 속하게 될 것인 바, 이런거 따로 뽑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나...했음에도,

그래도 여전히 뽑을 영화는 있었다.


나만의 Guilty Pleasure: <식스틴 블럭>


선정 근거: 사실 이 영화는 무시하기 딱 괜찮은 영화다. 왜냐. 그럴만한 각종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으니까.

주연은 부르스 윌리스. 물론 형사 역이다. 게다가 역시나, 뭔가 다이하드 풍으로 고생고생 총질을 하고 돌아다닌다. 그리고 결국엔 정의가 승리하여 부패 경찰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해피엔딩까지, 천편일률도 대체 이런 천편일률이 없다. 그렇다. <식스틴 블럭>은 어디가서 괜찮다고 얘기했다가는 무시당할 것만 같은, 그런 카인드 오브 영화의 전형인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영화가 올해 개봉됐던 모든 ‘액션’ 영화들 중 최고라고, 바람부는 언덕 위에 홀로 서서 혈혈단신으루다가 생각한다.

부르스 윌리스의 노련한 퇴물 형사 연기부터, 좁아터진 뉴욕 뒷길을 빈틈없이 헤집고 다니며 능숙하게 완급조절을 해낸 연출, 사방이 막힌 것 같은 막다란 골목에서 또다른 길을 만들어내는 잘 짜여진 시나리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따스하기 그지없는 보상까지, 이런 영화를 만들기란 무시하는 일처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헐리우드판은 그리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판이 아니다.

그래도 역시 <식스틴 블럭>은 아닌 거 같다구? 뭐, 그럼 말구.

* *

자, 필자의 급조된 '올해의 베스트' 목록은 대략 이렇다.

뭐, 이런 순위에 무슨 의미 같은 게 딱히 있겠는가. 우리가 초딩시절 했던 연말 앙케이트처럼, 그냥 한 번 웃고 즐기자는 정도지.

모쪼록 즐겁고 행복한 영화 많이들 보시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연휴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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