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잡상노트잡상

2006 11. 24

 


자주 꺼내보는 책 중 <잡상노트(雜想ノ-ト)>라는 책이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프라모델 잡지 <모델 그래픽스>에 연재했던 병기 관련 그림 에세이를 묶은 책인데, 사실 필자는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꽤 놀랐다.

뭐, 미야자키 감독의 오밀조밀한상상력박학다식한지식필력과따스함넘치는그림 뭐 그런 거에 놀랐다는 건 아니구. 그건 새삼 놀랄 일 조차도 전혀 아니니까.

필자가 놀랐던 부분은, 이 책 곳곳에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들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3회 <다포탑 전차 이야기>에서는 거대 전차를 몰고 다니는 악역 돼지들에 맞선 소년 소녀의 모험담의 설정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던가, 5회 <용의 철갑>, 8회 <Q. Ship>에서는 이러저러한 영화를 만들고자하니 스폰서를 구한다는 컷들도 있다.

3회 <다포탑 전차 이야기> 끝부분에 적혀있는 글. 짧디짧은 일어실력으로 번역해보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이러한 만화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은 2억엔 지참해주세요. 1년 기다리시면 70분 짜리 총쳔연색 만화영화를 만들어 드립니다.(PR)"

5회 <용의 철갑>의 마지막 컷. 뻔뻔하게도 계속해서 짧디짧은 일어실력으로 번역.


" <스폰서 구함!!> 그렇다!! 다음에는 다포탑의 침몰하지 않는 전함 '흉악 1호에 대한 영화를 기획하자!! (재기를 모색하는 팔불출 돼지)"

8회 <Q. Ship>의 마지막 컷.


" <스폰서 구함!!> 그렇다!! 다음에는 다포탑 잠수함에 대한 영화다. "

images © 二馬力 1997


그리고, 빈번한 가스 분출은 결국 건덕 배출로 귀결된다는 속담처럼, 심지어 14회부터 16회까지 3회에 거쳐 연재된 <비행정 시대>는 실제로 장편영화 <붉은 돼지>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뭐가 놀랍다는 것인가.

필자가 놀라워 마지않게 생각하는 점은, 이런 좋은 기획안들이 벌건 대낮에 노출되어 있어도, 이걸 갖다가 비스무리하게 베껴서 조잡한 영화라도 한 편 만든다던가하는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야자키 감독의 아이디어에다가 그의 그림인게 너무나도 확실한데, 그걸 어떻게 비스무리하게 베껴먹겠냐고 하시려는가.

필자, 우리나라를 일본에 비교해서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햄스터 코딱지만큼도 없다만, 서글프게도 우리나라에서라면 그런 일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지난 20세기, 일천구백 하고도 구십팔년, 영화 <넘버3>가 부르짖었던 "개가 소를 베끼고 소가 개를 베껴먹"던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지금 한국 문화판의 현실을 보면 말이다.

*

문화의 본질은 창작이다.

하여, 오랜 시간동안 쥐나도록 노력하여 자신만의 것을 창작해내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의 문화는 미래를 가질 수 없다.

나라의 법이 관대(또는 허술)한 덕분에 파렴치한 도둑질을 하는 자들이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 하는 쪽은 소비자 뿐이다.

표절이나 모작 같은 도둑질로는 문화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창작자들을 이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문화의 질을 유지하고 끌어올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캠페인 한 마디 버전으로 요약해드리면 '따라쟁이 외면하여 선진문화 이룩하자' 뭐 대략 이렇게 될 이런 얘기를, 근데 지금 난데없이 왜 들이미는 것인가.

요즘 가을개편을 맞이하여 새로이 단장했다는 몇 TV 프로들을 보고 있노라니 도대체 한심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어, 한 마디 했다.


베끼고 도둑질해갔으면 좀 재밌기라도 할 것이지. 쯧쯧...





© 한동원 1999~
이 사이트의 모든 내용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인용시 반드시 출처를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트의 모든 내용은 AI 학습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