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2006 8. 31
© illustrtion by Hahn Dong-Won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많은 파일럿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전쟁이 끝난 다음 그들은, 정작 전쟁을 벌인 당사자들에 의해서 사냥철 지난 뒤의 사냥개쯤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신기한 볼거리에 목이 말랐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건 묘기 비행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 당시만큼이나 많은 파일럿들이 하늘에서 죽어갔다.
그들에게 생계의 압박은 적기의 기관총알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전쟁의 끝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몸처럼 아끼던 비행기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그나마 운이 좋은 비행기들은 헐값에 부자들의 장난감으로 팔려 나갔다. 하지만, 격납고 임대비 정도의 돈도 벌어들일 수 없었던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엔진부터 꼬리날개까지 철저히 분해되어 이곳저곳으로 팔려 나갔다. '창공의 수호신', '조국의 날개' 등의 이름으로 불릴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런저런 용도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극히 운이 좋았던 경우도 있었다.
특급 우편 배달용 항공기가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목숨을 건 에어로바틱 묘기를 부릴 필요도, 온몸이 분해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비행기와 파일럿은 조종석 뒤에 우편물 꾸러미들을 쑤셔 넣고, 평화로운 밤하늘을 평화롭게 그리고 빠르게 날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더 이상 적기에게 뒤를 잡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파일럿은, 두꺼운 가죽 털옷 한 벌로 밤하늘의 얼어붙는 냉기를 막으며, 더 이상 기관총의 폭탄을 나르지 않게 된 왕년의 전투기와 함께, 아직 임시 번호판도 떼지 못한 신품인 평화를 양껏 맛보았다.
이 평화가 준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치열한 공중전에서 살아남아 다시 땅을 밟아야만 피울 수 있었던 담배를, 이제는 조종석에 앉아서 느긋하게 피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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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가죽 장갑을 벗고, 바람을 피해 간신히 담뱃불을 붙인 조종사는, 고도계를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또 한 번 생각했다.
이렇게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이 축복만은 아니라고.
그 평화롭고도 두꺼운 어둠 속에서, 그가 뿜어낸 담배 연기는 짧은 순간에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예전, 그의 많은 동료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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