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
2005 9. 27
참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영화 대사 중, 두 개 괜찮은 것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최근 본 연애 관련 영화 중 가장 재미있었다고 - <헐리우드 엔딩>을 본 지금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 생각하고 있는 영화인 <인 굿 컴퍼니>의 대사다.
최근 이혼을 당한, 스물하고도 일곱살 짜리 상무이사(토퍼 그레이스)가,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예순줄의 부하직원(데니스 퀘이드)에게 묻는다.
"도대체 결혼 생활의 비결이 뭔가요?"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날아온다.
"평생 참호 속에 같이 있을 사람을 찾아내고,
찾아낸 다음엔,
참호 밖에서 거시기 단속을 잘 할 것."
* *
물론 마음에 드는 건 첫 문장이다.
추운 겨울,
비좁은 참호속에 두 명의 군인이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면서 한 까치 남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누군가 날라온 커피를 같이 마시고,
그러다가 군화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애인 사진을
스물 일곱번째 보여주면서
마치 처음인 듯 자랑하는 등등등..참호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런 카인드 오브 정경은, 필자 단숨에 흐물흐물화 해버리기에 충분했다. 두번째 문장의 상당한 범생성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리고, 이렇게 떠오른 정경은 자연스럽게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바스통'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그 겨울의 참호'로 이어진다.
* *
그 옛날, 추억의 외화 시리즈 <전투(Combat!)>에 그 기원을 둔, 양키들의 '아글쎄 우리가 이겼다니깐요'에 대한 강력한 거부지심 덕분에, 오랫동안 기피 대상 1호였던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
하지만 나름대로 유서깊은 필자의 이러한 저항도, 바스통의 '눈 덮인 겨울 숲 참호' 앞에서는 허망하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그 참호에는 이런 인용구가 붙어 있다.
"후퇴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럴 곳이 없기에
참호를 깊게 파고, 그리고 기다린다."- 506연대 '커래히' 스크랩북에서
* *
요즘엔 '깊은 참호'를 자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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