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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2005 5. 7

 

어제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책방에서, 오랫동안, 실로 오랫동안 별러왔던, 그러나 항상 서점에 가서 까먹어버리곤 했던 홈즈 영문판 구입을 결행했다.

뭐 워낙에 필자가 잉그리가 좀 되는지라 웬만한 책은 잉그리로 안 보면 도무지 읽은 거 같지도 않기 때문에는 물론 절대 아니고,

왜 굳이 영문판이냐. 여기엔 다음과 같은 사연들이 있다.


1. ~네 체의 문제

작년 쯤 너도나도얘도쟤도니네도우리도개도소도말도양도모두모두두루두루 합심해서 쏟아내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셜록홈즈 번역자 협회의 만장일치 의결인 듯, 단 하나의 예외도 없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네 체'다.

그렇다. 최근 국내에 출판된 홈즈 시리즈의 모든 대화는 "~했다네" "~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등등의, <명동 주먹박사> 시대에나 횡행했을 법한 말투로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같이 각종 습관적 문어체를 상당히 경계하며 삼가는 사람에게는, 이런 식의 번역은 상당한 스트레스 요인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홈즈 시리즈에서는 홈즈와 왓슨 박사의 대화가 그 내용의 주종을 이루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죽음을 넘나들며 동고동락한 이 두 사람이 내내 "~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네." "~좀 주겠는가?" "~한것이 아니라네." 등등의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건, 상당히 안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나?

2. 삽화의 문제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최근 나온 홈즈 시리즈 번역판에는 경쟁적으로 삽화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 삽화는 '영국 최고의 홈즈 삽화가가, 초판에 그려넣은 삽화'라고, 즉 그 족보와 계통이 확실한 삽화라고 주최측에 의해 주장되고 있긴 하다만, 뽕이다.

일단 그 삽화의 질이라는 것이, 어디 인터넷 사이트에서 굴러다니던 걸 방금 퍼온 것 같이 픽셀들이 찌글거리는 조악하기 그지 없는 것인데다가, 사실, 질이고 뭐고 이 삽화라는 존재 자체가 도대체 쓸데없기 이를 데 없는 참견이 아닌가 말이다.

아 누가 홈즈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나 봤어. 누가 물어봤냐구.

적어도 20년이 넘게 묵은 내 상상속에서의 홈즈는, M자형의 드넓은 마빡을 가진, 2류 호텔의 지하 당구장 주인같은 그런 얼굴의 소유자는 아니란 말이다.

3. 비주얼의 문제

일단 표지. 이건 이번에 산 영문판의 표지다.

그리고 이건 번역본 중 하나.


뭐, 디자인은 그렇다치고 넘어가고, 위 번역본의 가운데에 희끄무레하게 떠 있는 인물의 실루엣을 보라.

꾸부정한 자세에 신부님 모자를 쓰고, 한 손에 길다란 우산을 짚고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이건 브라운 신부다.

홈즈 시리즈 표지에 브라운 신부라니. 이건 이순신 장군의 전기에 퇴계 이황의 그림을 갖다박은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근데 문제는 표지 뿐만이 아니다.


이 번역본이 바로 그 문제의 삽화 번역본인데, 삽화까지 그렇게 열심히 넣었으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만서도, 이 판의 본문 활자는 거의 신문 사회면 헤드라인으로 써도 무방할만큼 크다.

최소한 이 활자 크기만으로 미루어 볼작시면, 우리나라 출판에서 홈즈 시리즈는 아직도 동화, 잘해야 청소년 도서다.

하긴, 그 큰 서점에서도 추리소설들은 판타지 소설 코너에 간신히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다가, 그나마 나와있는 소설들의 70%는 아가사 크리스티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고 해야 할라나.

여튼 뭐 대충 이런 이유들과 기타 등등의 이유로, 필자는 급기야 홈즈의 영문판을 사기에 이른 것이다.

근데.

이렇게 적다 보니까 말이야,

이 모든 불평불만의 대부분이 필자의 책에도 그대로 해당되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음 확실히 그래..

흠흠흠...

* *

어쨌든 책이란 신기한 것이다.

잘 만든 책은 그 페이지를 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를 바꿔놓는다.

새 종이 냄새 듬뿍 배어있는 <셜록 홈즈의 모험 그리고 추억>의 쥐색 종잇장에서는, 베이커 거리 221 B번지를 떠다니던 파이프 담배 연기 같은 뿌옇고 서늘한 안개의 냄새가, 지금도 스리슬슬 풍겨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건 확실히 내 20년 묵은 상상속의 그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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