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문제
2005 3. 7
요즘처럼 레이먼드 챈들러가 잘 읽히는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토요일 오후 3시의 TV 쇼프로그램 만큼이나 지루하게 느껴줄 수도 있는, 그 정밀묘사적 문장 하나하나마저도 빠짐없이 쏙쏙 흡수되니 말이다.이건 마치, 4개월 내내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에서 굴러다니던 스폰지가, 갑자기 태평양 한 가운데로 던져졌을 때 느낄 그 기분이랄까..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역시 필자는 이런 카인드 오브 소설을 읽을때마다 예외없이 겪는 고통을 또다시 겪고 있으니, 그건 다름아닌 '이름 외우기'다.
예전에 얘기했던 롬멜 평전 같이, 사정없이 긴 이름들이 사방에서 무턱대고 파노라마쳐 넘실대는 책에서라면 고통은 차라리 덜하다. 그런 이름은 그냥 길이로 대충 기억하면 된단 말이지.
예를 들어,
'빌헬름 에른스트 폰 마이어 장군' ⇒ '4.7cm 장군',
'칼 프리드리히 메서슈미트 박사' ⇒ '3.9cm 박사'...
뭐 이런 식으로.
하지만 곤잘레스니, 심스니, 오린이니, 클라우센이니, 플락이니, 베이퍼스니, 스틸그레이브니, 험블턴이니, 빈스니 하는 그만그만한 길이의 이름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면, 이건 정말 방법이 없음이다.
게다가 여기에 반 뉘스 호텔이니, 센셋 스트립이니, 도허니 드라이브니, 로마노프 식당이니 하는 지형지물의 이름들까지 가세하게 되면, 거의 라이프니츠 정리를 적용한 삼중적분의 발산 문제를 맞이한 중학교 1학년 생의 심정이 돼 버리는 것이다.
요즘 들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물론 본문 맨 앞 페이지에 '주요 등장인물 리스트'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책도 있다.
등장인물
나 콘티넨털 탐정사의 샌프란시스코 지국원
빌 퀸트 퍼슨빌 시의 광부 조합장
엘리휴 윌슨 퍼슨빌 시의 으뜸가는 실력자
도널드 윌슨 엘리휴의 아들, 헤럴드 신문사 사장
...
뭐 이런 거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리스트 역시 그리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지국원' '조합장' '실력자' '사장' 정도의 단어로, 그 인물의 전모가 한 방에 파악되는 소설이라면, 아동서적 코너에 꽂혀있는게 맞지 않겠는가 말이다.그렇다면,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이 '등장인물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도 절박한 고민을 오랜 세월동안 일삼아 온 필자는 최근, 마침내 이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해법을 발견해내고야 말았다.
뭐냐.
그건 바로, 각 등장인물이 첫 등장을 하는 대목의 페이지를 적어주는 '첫 등장 페이지 표기' 메소드다.
인물별 첫 등장 페이지
필립 멀로우 p.11
오린 퀘스트 p.16
크리스티 프렌치 p.34
...
자, 어떠신가.
책 만드는 입장에서는 굳이 '인물에 대한 최대한 짤막한 설명'같은 걸 생각해낼 필요도 없다. 읽는 입장에서는 간편하게 그 페이지로만 가면 그 인물이 누군지를 금방 기억해낼 수 있다.
과연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하드보일드 소설 출판계에 종사하는 분이 계시다면, 부디 이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시길 부탁드린다.
이러한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필자같은 사람은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기 위해서 매일 하루 20분씩 고스톱을 치거나, DHA가 함유된 우유를 400cc 이상 섭취하거나 해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아 글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니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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