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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하드보일드 쪼크

2004 2. 6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새 번역판은 서점 바닥이 내려앉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요즘에도 하드보일드 소설들 만큼은, 일제 번역본을 다시 조잡하게 번역해놓은 30년 전 버전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피의 수확>이라는 이상스러운 제목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대쉴 해미트의 <Red Harvest>도, 역시나 그러한 '일제 번역본 그대로 갖다 번역하기'의 희생자인데 (血の收穫 ⇒ 피의 수확), 이 제목은 '피빛 수확' 쯤으로 번역해야 느낌이 맞아 떨어진다. 어쨌든,

요즘 필자 주변의 상황은 점점 하드보일드 풍으로 변해가는 추세에 있는지라, 이에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대처코저 대쉴 해미트나 레이먼드 챈들러 등을 통해서 하드보일드적 유머의 연마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다음의 대목들은 그러한 연마에 도움이 되고 있는 대목들의 예다.


1.

나는 물었다.

"징역살이 시킬만한 증거라도 있나요?"

"증거라고?" 서장은 상냥하게 웃었다. "윌슨 부인이 나한테 준 증거를 갖고서도 그 자를 집어넣지 못한다면 나는 소매치기보다 나을게 없을꺼요."

나는 이 말에 대한 재치있는 대꾸가 두 세마디 떠올랐지만 잠자코 있었다.


2.

"당신 결혼했어요?"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맙시다."

"그럼, 했군요?"

"안 했어요"

"안 했다니, 부인에겐 천만다행이네요."

이 농담에 적당한 응수를 해주려고 머리를 굴리던 참인데 멀리서 불빛 하나가 길을 비추면서 올라왔다.


자, 이런 대사들에 '멋지게 응수해 줄 대사'가 몇 마디나 떠오르시는지?

3초 안에 두어 마디 정도가 떠올라 줬다면, 싸구려 호텔의 창문으로 날아드는 톰슨 기관총의 총알 세례를 피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10초 정도 걸려 한 마디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면, 소설의 중간 부분에 도달하기도 한참 전에 '이젠 더 이상 늙지 않게' 된다.


하드 보일드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곳은 농담마저도 자동권총 쏘듯 날려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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