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미키 마우스

2004 10. 28

 

느날 미키 마우스가 찾아왔다.

전설적인 초당 24프레임으로 수중 발레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던 그의 몸놀림은 온데간데 없었고, 대신 그의 피부는 철판과 리벳으로 뒤덮여 있었다. 관절은 볼트와 너트로 단단히 조여져 있었고, 아메바같이 유연하던 그의 두 팔 역시 육중한 스프링 덩어리로 대체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모습은, 팀 버튼이나 닉 파크의 애니메이션에 악역으로 우정 출연하고 난 뒤 의상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나타난 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몸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듯했다. 제멋대로 철렁거리는 두 팔로 능숙하게 담배불을 붙여 문 그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덤덤하게 말했다.

"결국 이게 나를 위하는 길이라더군..."

사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게 대단히 놀라운 사건인 것은 아니다. 그를 그렇게 만들어야겠다는 회사 측의 계획은 이미 어느 정도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던 터였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 바로 그런 거다.

오랜 공백이 계속되는 동안 그의 몸과 마음은 노쇠할 대로 노쇠해져 갔다. 어느 날엔가 갑자기 낡은 필름이 뚝 끊어지듯 더 이상 출연 교섭은 들어오지 않았고, 동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신인들이 튀어나와 자신의 자리를 채워갔다.

사람보다 갯수가 적은 손가락에 대한 임시 방편으로 끼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그 커다란 흰 장갑. 그걸 갈아 낄 시간조차도 부족했던 전성기 시절, 백스테이지에서 쫓기듯 짧은 키스를 나누던 미니 마우스도 자신의 곁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오랫동안 자신과 호흡을 맞추던 친구들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새 경영진이 '이제 다시 인간이다'라는 르네상스적 모토를 앞세운 새로운 만화영화를 등장시키기 직전, 왕년의 스타들은 모두 '정중한 가택연금'을 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만큼 저들은 철저했고, 그들은 낙관적이었다.

* *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누구누구 탄생 몇몇 주년 기념식' 같은 것에 가끔 불려나가는 일을 빼고는, 그는 몰락한 오스트리아의 귀족같이 디즈니 월드의 성 안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타의로 시작된 강요가 어느덧 자의에 의한 체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세월 동안, 그는 내쉰 한숨의 수만큼의 주름살을 늘여갔고, 관절은 뻑뻑해졌고, 흰 장갑은 누렇게 바래갔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회사에선 왜 자네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 어차피 이젠 그 '사람이 나오는' 애니메이션마저도 한물가 버린 지 오래잖아. 새삼스럽게 자네를 뜯어고쳐서 다시 영화에 출연시키려는 것 같지는 않고.."

예상대로 미키는 깊은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어쩌면 깊은 한숨에 실려 담배 연기가 배출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철판 아래에서, 마녀의 명령을 받은 낡은 성의 담쟁이넝쿨마냥 또 하나의 주름이 늘어나는 장면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구." 미키는 말했다.

"그래. 내 얼굴 말이야. 이렇게 되기 전의 내 옛날 얼굴. 그게 아직도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단 말이야. 디즈니 월드 입구부터, 구멍가게의 막대사탕까지 말이지. 회사에서 그걸 계속 사용하려면 어쨌든 나는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모든 계약엔 계약 당사자라는 게 있어야 하거든. 말하자면, 자동차의 주유구와 배기구 같은 관계랄까, 뭐 그런 거지."

예의 그 미묘하게 길이가 다른 젓가락 한 짝 같이 어정쩡한 비유와, 필터 끝이 그을릴 때까지 태운 꽁초를 남겨두고 미키는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달랐던 것은, 그의 모습이 현관문 뒤로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희미한 태엽 소리가 남았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찌이이이 찌이이이....

* *

몇 주 후, 큼직한 소포가 도착했다.

발신인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누런 소포 봉투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톱밥과 그 속에 묻혀 있는 비디오테이프 한 개가 달랑 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톱밥을 털어내고, 비디오 데크에 테이프를 넣자 이런 것이 나왔다.


영상


어쨌든 그의 유머 감각은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온몸이 참치깡통으로 뒤덮인다 해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는 한, 내게 미키는 언제나 미키다.





© 한동원 1999~
이 사이트의 모든 내용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인용시 반드시 출처를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트의 모든 내용은 AI 학습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