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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훌륭한 책

2004 10. 25

 

면서 일부러 백화점의 지하 식당가(소위 '스낵코너')를 찾아가는 일이 과연 몇 번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럴 확률은 동전 야구장에서 두 판 연속으로 공 10개 전부를 쳐내게 될 확률보다도 낮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 나는 제 발로 그 희박한 확률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으니, 그건 오로지 그곳에서 상당히 그럴듯한 태국 쌀국수를 판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그깟 국수 때문에?'라고 할 수도 있겠다. 허나, 각종 '태국 식당'을 표방하는 곳들에서 터무니없는 음식값과 터무니없는 맛에 심리적 복합골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당하면, 한 사람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되고 마는 것이다.

여튼 그리하여,

나는 얼마 전에도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기다리면서 백화점 지하 식당가의 의자(라고 주장되던 물체)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은 내게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문제를 던졌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건 물론 러시아 혁명문학스러운 대명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들 밥 먹는 데서 자연스럽게 개기기'에 대한 고민이다.

이 기약 없는 시간 동안, 난 대체 무엇을 하면서 개길 것인가 말이다.

남들 밥 먹는 걸 구경하고 있는 건 너무 우울하다. 그렇다고, 경찰 취조실도 아닌데 벽이나 책상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다.

물론, 노트북 같은 걸 꺼내놓고 있을 수도 없다. 그건 분명 양털로 만든 커피잔 이상의 위화감만을 조성할 것이다.

* *

그 작지만 결코 가볍진 않은 위기 상황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바로 며칠 전에 산 체홉의 단편집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하드커버 양장본 따위의 꼴깝성 허세는 일체 없이, 한 손으로 가볍게 꾸겨 쥘 수 있는 크기와 재질의, 말하자면 더플코트 주머니 속의 새끼 고양이 같은 느낌의 이 단편집.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에 맞을 만한 길이의 이야기를 골라서,

제목도 읽지 않은 채,

툭 펼쳐서 곧장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그 잠시의 시간만큼은, 나는 백화점의 지하도 아닌, 시끄러운 식당도 아닌, 불편한 의자 위도 아닌, 친구를 기다리는 곳도 아닌,

그 어느 곳도 아닌 어떤 곳에 있다.

* *

바글거리는 식당에서도, 만원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역 플랫폼에서도, 어디에서도 펼쳐볼 수 있는 책.

개인적으로 '화장실 북'이라고 부르는 이런 책이야말로 진정 훌륭한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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