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잭슨 이야기
2004 10. 20
한때는, 참으로 열심히도 들었던 AFKNAmerica Forces Korean Network.
지금은 AFN Korea라는 명칭으로 바뀌긴 했지만 나에게 AFKN은 AFKN일 뿐이다. 파월이 잔소리를 하건, 럼즈펠드가 협박을 하건, 지들끼리야 정답 아니라고 하건 말건.
나름대로 재수없다고 하면 꽤나 재수없다고 할 수도 있는 이 미군방송을 그리도 열심히 들었던 이유는 물론, 군소리 잡소리 없이 음악만 줄창 나온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 AFKN이라는 방송이, 한 3분 동안 판이 튄다거나 한 15분 동안 아무 소리도 안 나오는 등등, 보통의 우리나라 방송이라면 피디 이하 줄줄 시말서를 써야 할 대형 방송사고를 하루에도 두세 번은 우습게 치면서도, 일언반구 사과 한 마디 안 하는 배째라 방송이다 보니, 가끔씩은 '이거 좀 너무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 터프함이 가장 치명적으로 느껴질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전혀 처음 듣는, 그러나 아주 마음에 드는 곡이 나왔을 때일 것이다.
대형 방송사고에 사과 말씀 한 마디 안 하는 방송인 마당에, 곡 제목이나 뮤지션 이름을 상냥하게 얘기해 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오로지 얼굴만 알고 있는 미녀를 찾아 끊임없이 바람 부는 벌판을 헤매는 비련의 남자처럼, 불쌍하게 그 곡을 찾아 헤매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왜 여기에 굳이 '불쌍하게'라는 단어까지 써야만 할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가끔가다가 그런 종류의 곡을 알 것만 같은 사람에게 기억하고 있는 멜로디를 옹알이하듯 웅얼웅얼(당연하다. 가사를 모르니까) 불러주면, 돌아오는 반응은 필시 '그거 음악 맞어?' 또는 '하하하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긴 그걸 불러주고 있노라면 나 자신도 3초 내로 회의와 후회 상태에 빠져버리고 마니, 상대방을 탓하기만 할 수도 없고...
어쨌든 그런 '이름 모를 미녀'들 중, 우연한 기회에 극적으로 정체를 알아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잭 존슨(Jack Johnson)의 'Flake'라는 곡도 바로 그러했다.
오랫동안 머릿속 메모리를 차지하고 있던 바로 그 곡의 그 멜로디를 홍대 앞 모 바에서 숙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되자마자, 주인장에게 뮤지션과 제목을 물어보고 그걸 쪽지에 적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좋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 쪽지는 약 4시간 뒤, 빈 성냥갑과 함께 이름 모를 버스 정류장의 쓰레기통이라는 영원한 세월 속으로 멀어져 가버리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고,
짧은 만남은 또다시 긴 이별의 파도 속으로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
* *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조 잭슨(Joe Jackson)이라는 사람의 앨범을 한 장 보유하게 된 사연이다.
아마 잭 존슨이 아니었다면 평생 그 존재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것을 알 필요 또한 전혀 느끼지 못했을 그 이름, 조 잭슨...
쪽지에 적혀 있던 이름이 완전한 망각의 암흑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달려간 레코드샵에서 숙명적으로 마주치게 된 그 이름, 조 잭슨...
왜곡된 기억과 오래된 열망과 확률의 장난이 마술처럼 조우한 접점, 조 잭슨.
그렇다. 그곳에는 '어라, 이 사람, 생긴 게 음악하고는 너무 안 어울리는데..?'라는 자연 발생적 의심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면도날조차 들어가지 않는다는 고대 잉카 문명의 견고한 성벽 같은 확신에 가득 차 모든 의심을 증발시켜 버리던 조 잭슨의 그 매서운 눈빛 앞에서라면,
그 앞에서라면, 어쩌면 진짜 잭 존슨마저도 슬그머니 조 잭슨으로 개명하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 *
그런 쓰라리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차마 쪽팔리는 실패를 경험한 끝에, 결국 손에 넣게 된 잭 존슨의 앨범과 그 다섯 번째 곡 'Flake'.
가을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는 지금, 이 노래가 없었다면 몇 가지 오래된 것들과 이별해야 했던 이 가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소중한 것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
올가을엔 그걸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굳이 조 잭슨이 아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