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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그의 소설

2004 6.19

 


자, 여기에

아주 많은 재료를 섞고,

그 위에 영문도 모를 복잡한 장식들을 잔뜩 얹어 놓은,

거하디 거한 케이크가 있다.

그 케이크는 워낙에 거하고 복잡해서, 도저히 그 맛을 짐작할 수 없다.

다 먹어본다 해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케이크 앞으로,

투박한 손이 하나 다가온다.

그 투박한 손에는, 아주 얇고 날카로운 날이 붙은 나이프가 들려있다.

그 손은 케이크 앞에서 오랫동안 조용히 멈춰있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갑자기

케이크의 한 부분을 도려낸다.

물론 나이프가 잘라낸 부분은,

케이크의 가장 맛있는 부분이 아니다.

가장 예쁜 부분도 아니다.

하지만, 그 조각을 한 번 먹으면

그 맛은 거의 영원히 남는다.

케이크 하나를 통째로 다 먹었다 해도,

결코 맛볼 수 없었을

그런 맛이.

·


내게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그런 존재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대성당을 지었고,

세상에서 가장 깊이 흐르는 강을 만들었다.

단 한 번의 짤막한 칼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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