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몇몇 구체적인 대사나 정황들을 적고 있으므로, 그런거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 보고 싶으신 분들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

뭐, 예고편에서부터 익히 짐작이 갔지만 역시나 <T3>는 특별히 재밌지도 않고 특별히 재미없지도 않은, 그러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는 정말이지 빼버리고 싶은, 한마디로 <에일리언 4>스러운 영화였다.

어쨌든, 돈 왕창 쳐들인 티 하나는 제대로 내는 영화이기도 하고.

특히, 가만히 주차된 차 수십대를 대왕 크레인을 동원하여 아무 이유없이 줄줄줄 뽀개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걸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가 나쁜놈으로 느껴지기조차 했다..

아무리 차 수백대를 뽀개고, 대포 삼만발을 쏘고, 신제품 여류 터미네이터로 각종 관절꺾기를 보여준다 한다 한들, 아무 내용도 개연성도 없는 비주얼은 결국 삽질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은, 이젠 굳이 읊조릴 필요도 없는 얘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돈지랄 말고, 이 영화에서 필자의 주목을 끌었던 대목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아놀드 형님이 개봉 전 인터뷰에서부터 미리 그 존재를 밝혀온 이 영화의 '한 방 해주는 대사'였다.

원래 진정한 한 방이란 관객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거늘, 미리 "알 비 백"에 필적하는 한 방이 있을꺼라는걸 사방에 광고하던 아놀드 형님의 발언은, 필자를 깊은 불안과 우려의 도가니탕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역시나..

영화는 '이중 한놈만 제대로 얻어 걸려라'는 듯이 시도때도 없이 주구장창 그런걸 내놓고 있었으니, 지금부터 그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그것은, 그 공포감 제로의 여류 터미네이터 TX로부터 시작된다.

예의 그 벤존슨 칼루이스 자세로 백화점 쇼윈도에 나타난 TX..

기왕에 쇼윈도에 나타난 김에, 바로 거기서 마네킹에 걸쳐있던 옷을 입을 줄 알았던 TX는, 예상외로 길 건너편에 서 있던 차 앞까지 유유히 걸어 간다. 왜냐.

당연히 남성관객들 좋으라구지. 아님 뭐겠어.

아닌 21세기에 이 촌시런 안구 발광증이 웬말이더냐.

어쨌든, 바로 이 홀딱신공과 함께 운전석에 앉은 여자 앞에 멈춰선 TX는, 마침내 첫번째 한 방 후보를 날려준다.

"I like this car"

그리고 이 대사는 곧이어, 옷과 차를 동시에 삥뜯은 TX를 과속으로 단속하러 온 경찰에게, 다시 한 번 재활용되어 날려진다.

"I like your gun."

물론, 이렇게 한 번 꺾어서 돌려 말하는 타법은 단순명료 과격무식을 모토로 삼고 있는 터미네이터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터미네이터라면 모름지기 차를 뺏을때는 "내려" 등의 완전 직설법을 사용해야하지 않는가 말이다.

또한, 징박힌 양아의상이건, 헤비메탈 가죽 잠바건, 고물 트럭이건 헬기건, 패션이나 차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터미네이터의 실용주의적 노선으로 미루어볼때, '좋아해like' 따위의 패션 지향적 단어는 완전 부적절한 것이었던 것이 아닐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적절함은 그대로 T800, 즉 아놀드 형님에게 계승된다.

1편에서는 오로지 노출된 뻘건눈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만 사용되었던 썬그라스... 그러나 <T3>에서 아놀드는, 아무런 이유없이 죽어라 썬그라스에 집착함으로써 터미네이터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완전 상실한 채, 패션에 집착하는 소인잡배적 행태를 보인다.

처음 삥뜯은 의상 안주머니에서 나온 별모양 썬그라스부터 시작해서, 편의점에서 삥뜯은 정상적 썬그라스까지.. 아놀드의 썬그라스는 이미 과거의 결정적 갑빠를 상실한 채, 한낱 어설픈 코메디를 위한 소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소룡 큰형님부터 주윤발 형님을 거쳐 터미네이터에 이르기까지..

동서를 초월하여 지켜지고 계승되어오던 썬그라스의 道가 한 순간에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본 필자.. 그것은 실로 눈알 빨개지는 슬픔이었다.

뭐, 그치만, 썬그라스의 道를 깨우치지 못한 관객들에게는, 대사에서 한 방만 제대로 해준다면 그깟 소품 따위야 어떻게 되건 별로 문제될 꺼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사쪽을 살펴보자.

아놀드의 첫번째 한 방 후보는, 존 코너의 아내가 된다는 케이트(클레어 데인즈)에게 날려진다.

아직 아놀드를 아군으로 파악못한 케이트를 트럭 뒷칸에 피신시킨 뒤, 나중에는 아예 가둬버리는 아놀드. "얌전히 있으면 보내준다고 했잖아요!"라고 항의하는 케이트의 면전에 대고, 아놀드는 냅다 첫 방을 날려준다.

"I lied"

뭐, 이 첫 방까지는 그런대로 재밌었다.

하지만, 아놀드가 TX를 대왕 크레인 운전석에서 끌어내면서 날린, 두번째 한 방 후보

"Excuse me"

부터는, 한 껀을 향한 과도한 의욕만을 앞세운 매너리즘의 조짐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세번째 후보를 날리는 대목에 이르러 아놀드는,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구 벌써부터 완전 매너리즘에 빠지며 오바를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편의점에서 닥치는대로 물건을 카트에 쑤셔넣던 아놀드가 마침내 카운터 앞에 당도하자 점원은 "계산은 하실꺼죠?"라는, 쎈타링성 대사를 날린다.

그리고 약 1초간의 침묵.. 이 침묵 동안 관객들의 기대는 당연히도, 아놀드가 과연 이 쎈타링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집중된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점원의 얼굴앞에 손을 쭉 내밀면서

"Talk to the hand.."

라는, 뜬금이 상당히 없기도 하면서 이해도 완전 안되는 대사를 날리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손에다 대고 말해라'라... 운전대 잡고 있으랴, 총 들고 있으랴, 관짝 들고 나르랴 등등으로 상세한 거의 관찰이 불가능하였으나, 알고보니 T800은 손바닥에 스피커가 장치된 신모델이었더라.. 뭐 이런거였나? 조또.

여튼, 이 대사를 필두로, "I'LL BE BACK"의 영광을 재현해낼 결정적 한 방을 향한, 어느 한 놈만 걸려라 식의 완전히 양으로 밀어붙이는 아놀드의 야심은 점점 노골화된다.

이리치고저리치고이리박고저리박고 하는 격투의 끝에 일시적으로 TX를 격퇴한 뒤, 아놀드가 읊조렸던 대사

"She'll be back"

은 그러한 야망의 노골적인 표현이었던 바, 필자는 그의 성실하지만 헛된 노력에 안쓰러움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놀드가 언급했던 그 최수의 한 방의 시간은 오고야 만다.

TX에게 바이러스를 주입당하여 아군도 공격할 정도로 맛이 간 아놀드.. 그는 다가오는 존 코너에게 자신을 피하라며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는다.

"나한테 감정을 기대하지 마라. 나는 기계다."

그러나 이 대사는, 이빨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 이글거리는 필로 읊는 아놀드의 연기 덕분에,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감정적인 대사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어찌저찌하여 아놀드는 존 코너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데 성공하고, 아놀드도 없이 도주행각을 하던 존 코너와 케이트는 마침내 TX에게 막다른 곳까지 몰린다.

결국 코너에 몰린 존 코너와 케이트를 향해 대포..같이 생긴...뭐시기를 겨냥하던 TX는, 어디서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대형헬기에 의해 덮침을 당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튀어나온 것은 당연히 아놀드였다.

그토록 거한 재등장을 한 그가 다음에 취할 행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오랫동안 참아왔던 회심의 한 방을 날려주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I'M BACK"

이라는, 이 영화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결정적 한 방 후보작이 날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도, 이 작위적인 한 방을 접한 필자는, 그 노력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 뻔함에 대한 민망함, 그리고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려고 용을 쓰는 아놀드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것들에 의해 종합적으로 형성된 쪽팔림이 한데 버무려진 쓴웃음을 웃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결정적 한 방이라는 것은, 이런식으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이미 결정적 장면계 뿐만이 아닌 영화계의 기본 상식이 되어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런 점을 애써 무시한채, 특유의 카리스마며 치밀한 스토리 같은 것들은 모두 초개와 같이 내버린 채, 잡스러운 사술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T3>...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가는 것은 별볼일없는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고 했던가.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만, 이 말은 이 영화의 경우에도 훌륭히 적용되는 말이다.

이번에 아놀드는 BACK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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