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뮤직
2004 3. 25
며칠 전 우연히 들은 음악에서 굉장히 에릭 클랩튼 같은 스타일의 기타가 들리길래 '어, 누군지 에릭 클랩튼 연구깨나 했군..' 하는 생각으로 알아봤더니, 그건 허무하게도, 그냥 에릭 클랩튼이었다.
그게 그냥 에릭 클랩튼일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물론, 콧구멍 바로 아래까지 블루스에 푹 잠겨있는 듯한 에릭 클랩튼의 최근 행보 때문이다.
조금만 있으면 아예 젖소 옆에 두고 거름더미에 기대서서 기타를 칠 듯했던 그가, 그렇게 백화점 바닥 같은 매끈한 분위기랑 더불어 같이 놀 줄은 정말 몰랐음이란 말이지. 그것도 그렇게 기습적으로 말이야..
어쨌든, 그런 연유로 사게 된 크루세이더스(The Crusaders)의 새 앨범 CD에는 Verve 레이블의 광고 쪼가리가 하나 들어있었는데, 그 모양은 다음과 같았다.
"무인도 CD - 당신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음악"
무인도 CD는 음악 애호가라면 필히 소장하셔야 할,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대중적인 10장의 재즈 음반입니다.
흠..
국내고 국외고 할 것 없이 웬만한 유명인사 인터뷰에서 기어이 한 번씩은 등장하고야 말았던 진부 컨셉의 대명사, '무인도에 가져갈 열 가지' 컨셉.
과거 <10대 가수 가요제>가 그 원류를 형성한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그 '열 가지 거시기' 컨셉이 마침내 멀쩡한 광고로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에 진부 컨셉계는, 거의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때와 비슷한 흥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리...
근데 실은, 전원생활을 풍미하는 기분으로 남몰래 진부 컨셉을 애호해왔던 필자 또한 아동급 여성들이 바비인형 옷 갈아입히듯, 그 '무인도 리스트'를 개비 또 개비하는 쓸데없는 짓을 해오고 있었더랬다.
단, '앨범'이 아닌, '곡'으로 말이지.
그렇게 해서 짜여진 '무인도로 가져갈 10곡' 리스트의 윗쪽에는 거의 영구 결번이라 할 수 있는 부동의 지위를 확립한 곡들이 일제히 말뚝을 박고 있는 바,
그중에서도 PMG의 "Are you going with me?"와 함께 공동 1위를 구가하고 있는 곡이 있었으니,
그건 역시나 에릭 클랩튼의 곡,
바로 이 곡이었던 것이다.
Eric Clapton
"Don't Think Twice, It's Alright"
이 곡은 밥 딜런 데뷔 50주년 기념잔치에 가서 부른 것으로, 다들 아시다시피 원래는 밥 딜런의 곡이다만, 그렇다고 이걸 기냥 '리메이크'라고 부르는 건 에릭 클랩튼에게 상당히 미안한 일일 게다.
이 정도의 곡이라면, 그건 이미 원곡이니 리메이크니 장르니 하는 문제를 넘어선 경지니까.
대체 누가 이 곡을 듣고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를 떠올리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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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각해보면, 무인도에 반드시 가지고 들어가야 할 곡이 꼭 열 개씩이나 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노래 한 개와 건전지 10개를 챙겨 들고 들어가겠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영화의 훌륭함을 관객의 머릿수로, 그것도 올림픽 100m 달리기 하듯 신기록 단축 어쩌구하면서 간단히 따져버리는,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것의 의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그 쪽수로 모든 걸 간단히 우겨버리는
그런 작금의 분위기에서는 전혀 환영받지 못할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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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진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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