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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담배연기의 무게를 재는 법'

2004 3. 11



“한번은, 그가 여왕과 내기를 했어.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잴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 이상하긴하지. 그건 영혼의 무게를 잰다는 얘기같은 거니까. 하지만, 월터경은 똑똑한 사람이었다구.

일단, 그는 피우지 않은 담배를 저울에 달았어. 다음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피우면서 그 재를 조심스럽게 저울 접시에 떨었어. 그리고 다 피운 담배를 재가 있는 그 저울에 올려놓고 난 다음에, 그 무게를 잰거야.

그리고 그 무게를 안피운 담배의 무게에서 뺀거지.

그 차이가 바로 담배 연기의 무게야.“



난번에 <스모크>얘기를 세번에 거쳐서 주리줄창 한 적이 있었다만, 그렇게 하고도 성이 안차서 또 한 번 <스모크> 얘기.

일단,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다는 말은 하고 들어가야 하겠지만, 워낙에 영화가 제목부터 담배 얘기라는 걸 박고 들어가니 필자로서도 뭐 어쩔 수 없다. 흠. 여튼,



이 대목은 폴이 오기의 담배가게에 갔다가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려주는 대목인데, 이건 영화의 제목이 나오기 직전인 맨 앞부분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담배로 치자면 담배갑의 맨 위의 은박 종이를 뜯어내는 공정에 해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은박지 뜯어내기 동작만큼이나 소소하지만 매력적인 향기를 스리슬슬 흘려주고 있다.

그런데, 위 이야기가 퍼뜨려오는 매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연원을 찾아, 우리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 ·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각종 <대 백과사전> 시리즈.

괴수, 로봇, 공룡 등.. 소시적의 우리들로 하여금, 이들이야말로 눈에 띄지 않는 음지에서 세계 질서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배후세력이라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케 할 만큼 충분히 수상스러웠던 각종 정체불명 아이템들.

이들을 총 집대성하여 그 계통과 체계를 공고히 확립하였던 실용 구라문학의 선구자, <대 백과사전> 시리즈를..

“고지라 vs 메카 고지라”, “大 도해 - 마징가의 내부 해부도”, “네스호의 괴물은 과연 브론토사우르스??!!” 등등 각종 주옥같은 내용들을 거리낌없이 토해내며 우리를 광대한 구라의 바다로 이끌었던 바로 그 <대 백과사전> 시리즈를..

이들 중, “지구 중심을 관통하는 터널을 지나간 아이!!”, “버뮤다 삼각지대에는 UFO의 기지가?!!”, “맘모스는 살아있었다!!” 등등 J.R.R. 톨킨을 무색케하는 스케일의 장쾌한 상상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전지구적 규모로 역사를 뒤집어 재구성해내는 호방함,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각종 출처불명의 사진까지 첨부해내는 치밀함과 집요함까지 두루 갖춤으로써 초등생 이하의 아동들에게 거의 바이블과도 같은 권위를 갖추었던, 대 백과사전 시리즈의 최고 걸작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의 미스테리 대백과 사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미스테리 대백과 사전>에서 소개되고 있던 그 주옥같은 구라들 중에서도, 특히나 필자를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었던 글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영혼의 무게를 잰 사나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이미 눈치를 채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나이가 영혼의 무게를 재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죽기 직전의 사람을 저울에 올려놓은 뒤 죽는 순간 줄어드는 체중의 양을 측정하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이 이야기에서 ‘영혼’을 ‘담배연기’로 대체하면 바로 위 대목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아...

이 <세계의 미스테리 대 백과사전>의 영향력이 태평양 건너 미국에까지 미쳤던 것인가, 폴 역시 “그건 영혼의 무게를 잰다는 얘기같은 거니까.”라는 대사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시적 대 백과사전으로부터 받았던 영향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지 아니한가..

비록 일본산이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짐으로써 다소의 재수없음을 안겨주긴 하였으나, 그래도 그 옛날 우리의 왕성하던 지적 욕구의 횃불과도 같았던 당 도서의 매력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정통성을 계승한 위 <스모크>의 '담배연기 무게재기' 이야기 또한 덩달아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

물론 위 대사는 “우린 지금 담배와 여자에 대해서 철학적 토론을 하고 있던 중이야.”라는 오기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상당히 뜬금없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식의 뜬금없음이야말로 이 대사가 가진 진정한 매력일지도 모른다.

담배 연기가 공기속으로 퍼져나가면서 알 수 없는 모양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인생을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만들어가는 우연의 아름다움을 조용하게 드러내주는 것이 <스모크>라는 영화의 매력의 핵심이니까 말이다.

그런 영화의 뚜껑을 여는 대사로서도, 역시 위 대사는 매력적인 대사다.

얘기를 마친 폴의 이 미소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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