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귀여운 장면들
2004 3. 4
최근 들어 마주쳤던 세 개의 귀여운 장면들.
1. 롬멜의 장미얼마전에 <지상 최대의 작전>의 DVD를 빌려다봤다.
영화 초반에, 롬멜 장군이 자신의 부관과 함께 사령부 앞마당을 거닐며 연합군의 반격에 대비하는 작전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설명을 마친 롬멜은 나름대로 상당히 은유법스러운 대사를 날려준다.
"태풍은 무섭지.. 그건 장미를.. (간격).. 꺾어놓기도 하거든.."
위 대사의 '(간격)' 부분에서 롬멜은, 실제로 바로 옆에 있는 장미에 손을 뻗는데, 그게 손을 댐과 동시에 거의 쓰러지듯 '톡' 부러지고 만다.
장미를 독일에, 태풍을 연합군에 비유한 그 60년대 풍의 순진무구한 비유법과, 그 대사를 치면서 애써 자연스러운 태도를 연출하며 장미를 슬며시 만지는 롬멜의 동작과, 나는 원래 째려만봐주셔도 꺾어질 용의가 있었다는 듯 톡 꺾어지는 장미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져, 실로 귀여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더불어, 조연출, 미술, 소품 담당 등이 그 '자연스럽게 부러지도록' 설정된 장미를 만들려고, 장미 한송이에 오물조물 달려들어 있는 풍경을 상상하면, 웬지 해변의 캠프 파이어를 준비하는 보이스카웃을 보는 듯한 흐뭇한 기분마저도 드는 것이다.
게다가, 그걸 다 만들고 난 뒤, 보람찬 표정으로 감독에게 검사받는 광경까지 상상하면 더욱.
2. 홈즈의 변장물론, 수많은 현대 추리단편들의 패러디의 대상이 된 셜록 홈즈의 예의 그 '홈즈식 추리'들은 모두 하나하나 귀엽기 짝이 없다.
난데도 없고 뜬금도 없이,
"왓슨, 자네 요즘 들어 물에 흠뻑 젖은 일이 있었고, 집의 하녀는 일이 아주 서툴고 매사에 소홀하지 않나?"
뭐 이런 대사 던지는 바로 그거 말이다.
하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에 있어서 가장 귀여운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인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에서 나온다.
바로 이 대목 말이다.
그는 침실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상냥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비국교도 목사가 되어 돌아왔다. 챙이 넓은 검정 모자, 헐렁헐렁한 바지, 하얀 넥타이, 인자한 미소, 그리고 예리함과 자애로운 호기심에 찬 전체적인 인상은 전 헤어의 연기 뺨치는 수준이었다.
홈즈는 옷차림만 달라지는게 아니었다. 그의 표정, 습성, 심지어는 심성까지 새로운 역할에 맞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가 범죄 전문가가 됨으로써 연예계는 한 사람의 명배우를 놓쳤고, 더구나 과학계는 예리한 추론자를 잃은 셈이다.
연예계와 과학계를 한 데 묶어 긍휼히 여겨주고 있는 저 마지막 문장.. 저 문장은 정말이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다.
3. 산사람 합창단얼마 전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피아노 연주자의 얘기.
'아르트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라는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적 이름을 가진 이 이탈리아 사람은, 성격면에서나 행적면에서나 대단히 안음악가스러운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멀쩡한 피아노 주자로서 명성을 날리던 이 사람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갑자기 전투기 조종사로 돌변하여 참전을 하고,
전쟁 말에는 마침내 포로로 잡혔다가 살아 돌아오기도 하고,
또 그 비행기 몰던 버릇을 그대로 계승하여 경비행기를 몰다가,
이걸 또 땅 버전으로 전환시켜서 페라리를 몰고 다니고,
급기야는 자동차 경주대회에 나가서 우승까지도 해버리고 만다.
근데, 팔 한 짝 창밖에 내놓고 페라리를 몰다가 그 팔에 일시적으로 마비까지 왔었다고 하니, 이건 거의 피아노 주자로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미켈란젤리는 갑자기 스키에 미치는 바람에, 아예 알프스로 짐싸들고 들어가서 몇달간 쳐박혀서 내려오지 않아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그냥 거기서 스키 타는 것에만 멈추지 않고 산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합창단을 조직한 다음, 결국 마을 연주회까지 열었다는 대목이었다.
아아, 그런 귀여운 합창단이라면 나도 꼭 한 번 멤버로 끼어보고 싶다.
물론, 그 합창단 멤버들은 모두 알프스 스키모자를 쓰고 있어야 하겠지.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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