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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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 계속해서 소모와 낭비에 대한 소모적이고도 낭비스런 고찰.
자, 그럼 당장에 반사적으로 떠오를법한 몇가지 후보들에 대하여 논해보도록 하자.
첫번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이템인 낛시. 이건 물론 아니다. 3번, 4번, 6번 조건에 모조리 위배된다. 물론, 급기야 가족들로부터 패대기를 당할 가능성이야 높은 분야다만.
두번째, 컴퓨터 게임. 이는 결정적으로 6번 조건에 위배된다. 물론 온라인 게임의 대두로 인해 5번 조건에도 어느 정도 위배되고. 과거의 오락실 시대와는 달리, 현재는 게임 전문 TV프로나 채널까지 생길만큼 龍 돼서 4번 항목의 완전 반대로 가고 있는 추세인 분야가 바로 게임 분야인 것이다.
세번째, 고액 고도리를 위시한 각종 도박. 이건 8번 조건에 맞지 않는다.
네번째, 담배 피우기. 물론 담배 피우기가 과연 취미인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어쨌든 그렇다고 치고 봐줘도 5번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담배는 그걸 피우는 사람들 사이에 잦은 대화의 기회와 은근한 동지감을 제공함으로써, 친목도모의 순기능을 제공하는 측면 또한 없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업중이라면, 상대방이 피우고 있는 담배를 은글스리슬쩍 도중에 뺏어서 피는 동작 한 번 해주는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작업 공정을 급속도로 단축시켜 주기도하고 말이지..
그럼 뭐냐.
이거저거 다 안되면 대체 뭐가 남는단 말이냐.
남는게 있다.
그 철저한 소모와 낭비의 화신이자 현신이며 대표주자는 다름아닌...
프라모델이다.
그렇다. 패션모델 슈퍼모델 할 때의 그 모델말고, 우리가 소시적에 '조립식'이라는 정체불명의 호칭으로 부르던 바로 그 프라모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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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취미는 1, 2번 조건을 매우 훌륭하게 충족시키고 있을 뿐더러, 최근 '새 아파트 신드롬'으로도 극명히 증명되고 있는 접착제, 페인트 등의 각종 유해 화학물질에 완전 노출되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3번 충족).
또한, 이거하는 사람들은 다 큰 어른이 애들 장난감 갖구 논다는 등의 개무시를 감내해가며(4번 충족), 그 코딱지만한 물건들 갖구 꼼지락 거리면서 잘하면 하루종일 방안에서 씨름해야 한다(5번 충족).
게다가 이걸 아무리 잘 해봤자 사이트나 잡지에 작품 사진이 실리는 정도일 뿐, 이 프라모델 만드는 재주만을 가지고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6번 충족).
그럼에도 그 중독성은 한 번 손대면 헤어날 수 없을꺼라며 두려움에 떠는 왕년 경험자들의 증언만으로도 익히 짐작이 가는 바 있다(7번 충족).
그리고, 프라모델 만들다가 구속됐다는 사람 본 적 절대 없으니, 8번 조건까지 완전 충족.
오오... 이토록 철두철미하게 소모낭비의 8大 조건을 충족시키는 취미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 자기 만족 외에는 투자한 시간과 노력과 돈에 비해 거의 얻는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취미 '프라모델 만들기'.
그 어떤 현실적인 이득이나 떡고물도 생길 가능성 없고, 하다못해 뭔가 멋들어지거나 뽀다구 나는 일도 아닌, 마치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듯한 이 취미...
필자는,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절대무익함이야말로 진정 '취미'라 부를 수 있는 것의 핵심정신이 아닐까한다.
심지어는, 우리모두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자는 얘기조차 '웰빙' 뭐 이딴 말로 포장시켜, 존나 공부해감서 각종 수소문해감서 박터지게 찾아댕겨감서 시류에 발맞춰 나가주지 않으면 빙신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는 TV와 신문의 악다구니가 창궐하고 있는 요즘...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그딴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흔들림 없이 온전히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자기자신만의 시간을 들여 자기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들어나가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가 '취미' 또는 '여가'라고 부르는 그것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오로지 아마추어 정신 확립의 한 길만을 추구하며 갖은 신산의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프라모델 가게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찾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등장인물 '조성훈'이 주는 감흥이 남달라,
간만에 장타로 적어봤다.
그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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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곰곰 생각해보니 8大 조건에 맞는 취미가 또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지그소 퍼즐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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