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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소모와 낭비 (1)

2004 2. 7



당신이 핀볼 기계에서 얻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대신된 자존심 뿐이다. 잃는 건 정말 많다. 역대 대통령의 동살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다만 당신에게 리처드 M. 닉슨의 동상을 세울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만)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당신이 핀볼 기계 앞에서 계속 고독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프루스트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여자친구와 <용기있는 추적>을 보면서 진한 애무에 열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고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핀볼 기계는 당신을 아무데로도 데려가 주지 않는다.


· · ·


구절은, 물론 <1973년의 핀볼>의 한 구절이다.

이 짧지도 않은 구절을 굳이 적은 이유는, 요즘 들어 이것이 상당한 빈도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기 때문인데, 그건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도달하게 된다.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소모'와 '낭비'란 무엇인가?


이건 물론 철학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질문 따위는 아니다.

그냥, 우리 주변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소모와 낭비의 개념에 근접해있는 건 뭘까 하는 단순한 의문일 뿐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 그리고 그걸 또 굳이 글로 끼적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모와 낭비의 전형적인 예겠지만, 뭐, 일단 시작했으니 어쩌겠어.

해서, 얘기를 계속 해보면, 일단 이렇게 추상적인 뭔가를 찾는데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검색 범위를 좁히는 일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일단 '소모'와 '낭비'의 반대가 되는 개념을 생각해 낸 다음, 그게 발견될 확률이 가장 낮은 분야를 택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소모'와 '낭비'의 반대가 되는 개념은 '생산' 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절제' '검소' '절약' 등의 단어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건 반대되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반대되는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하여, 뭔가 '생산'스러운 것이 발견될 확률이 가장 낮을 것 같은 분야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건 우리가 '취미'라고 부르는, 바로 그 분야인 것이다.

자, 검색 범위가 정해졌으니 이제 다음은 본격적인 검색이다.

조건은 이렇다.


1. 시간의 소모가 많아야 한다.

2. 금전적 소모 또한 많아야 한다.

3. 건강에 나빠야, 또는, 최소한 도움이 되지 않아야 한다.

4. 사회적 인식이 나빠야, 또는, 최소한 좋지는 않아야 한다.

5. 기본적으로 혼자서 해야만 한다. (점점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6. 높은 경지에 오르더라도, 본격적인 프로로 나서기 어려워야 한다. (즉, 큰 돈이 되지 않아야 한다)

7. 중독성이 매우 높아야 한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


자, 이런 조건을 완벽히 갖춘, 다시 말해, 완벽한 소모와 낭비를 가능케하는 취미가 떠오르시는가.

필자는 하나 찾아냈다.

그게 뭐냐구?

후후, 한 번 생각해 보시길. 의외로 재밌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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