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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ook
한동원의 글 수첩


롬멜 평전의 교훈

2004 1. 25



롬멜 평전 표지



디어 오랫동안 붙들었던 롬멜 평전 <롬멜(Mythos Rommel)>을 다 읽었다.

원래 책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니긴 하다만, 나름대로 흥미진진했던 이 책을 끝내는데 오래 걸렸던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다름아닌 등장인물들의 이름들 때문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독일어에는 웬만한 우리나라 문장과 맞먹는 길이의 단어들이 지하철 차량기지 객차들 마냥 줄줄이 포진하고 있다. 때로 독일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단어도 웬지 독일어 출신일것만같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다. 어쨌든,

사정이 이러한데 사람 이름이라고 예외일 리 있으리요. 롬멜 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몇만 적어봐도 이렇다.


칼 알브레히트 오베르크
빌헬름 리터 폰 슈람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
한스 오트프리트 폰 린스토우...


그리고 이들 중 가장 압권이라 할만한


루돌프 크리스토프 프라이헤어 폰 게르스도르프


에 이르르면 정말이지 백기를 들고 투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건 이름이라기 보다는 거의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수준의 대하 역사 서사시가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최소한 3대에 거친 집안 내력은 다 적어놓은 듯한 이러한 이름들도 감당키 힘든 이 마당에, 롬멜이 헤집고 다닌 아프리카 북부의 각종 지명과 프랑스의 도시명, 독일 도시명 등등이 끝없이 쏟아져 나와 짬뽕져 어우러지면, 필자처럼 이름 외우는데 소질 없는 사람은 거의 죽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긴, 러시아 이름처럼 한 이름이 5단 변신 정도는 우습게 해주는 시스템보다야 좀 낫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리하여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필자는, 지폐를 무게로 달아 쓰는 남미 국가 국민이 된 심정으로 이름 따위는 대충 길이로만 구별하겠다는 널럴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그랬다면 롬멜이 히틀러에게 독살당하는 대목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아직도 모래바람과 전차의 포연이 자욱한 아프리카 전선 어딘가를 헤메고 있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 ·


그렇게 끝까지 읽어내고야 만 롬멜 평전에서 얻은 교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끔은 마음을 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마도 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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