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사천왕>을 보고 나서


또 한번의 기대

이젠 이골이 날때도 됐다.

<블루 시걸>, <아마게돈>같은 극장용, <녹색전차 해모수>, <영혼기병 라젠카>같은 TV 용 애니메이션들이 가져다 준 기대와 실망의 반복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미련하게시리 매번 새로운 기대를 한다는건 아마도 디즈니,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과 일본의 아니메(アニメ)와는 다른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과연 우린 뭘 기다리고 있는걸까?

물론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온다면 그만한 일이 없겠지만, 당분간 그런 사건을 일어나지 않을꺼라는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 확실히 우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완성도를 원하는게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건 그게 아니다.

아마도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품을 수 있는 기대란 이런 것들이 아닐까.

1. "지구와 우주의 평화는 우리가 지킨다"를 넘어서는 제대로 된 스토리, 그리고 상상력

2. 관객들이 비웃지는 않을 정도의 움직임(놀라게 할 필요까지도 없다)

3. 동화책 삽화를 넘어서는 색채선택과 배경화

4. 영화적으로 말이 되는 화면구성

이 정도만 웬만큼 만족된다 해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넥스트같은 유명한 밴드가 취입한 주제가도, 유명한 배우의 목소리 더빙도, 이현세씨 같은 거물급 원작자도 주지 못한 즐거움을 가지고 말이다.

명실공히 '아동틱 표' 인데다가 대만과의 합작 덕분에 짱깨냄새 물씬물씬 풍기는 캐릭터들이 화면을 누비고 다닌 <또또와 유령친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항목들을 대부분 만족시켰다는 건 작년에 건진 몇 되지 않는 희망들 중 하나였다.

"100 디지털로 부활한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이라는 <철인사천왕> 역시 이런 기대를 품어보게 한다.

그 기대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철인사천왕>이 감행한 새로운 시도들이다.

『디지털 방식이니 다양한 움직임을 셀 방식보다는 정교하게 만들어냈겠지, 그러니 화려한 장면들도 많고 볼거리도 많겠지, 이 영화가 개발한 "디지-셀"이라는 기법으로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차가움이 극복됐겠지, "동양과 서양, 법력과 과학"이 "조화롭게 결합"까지는 안되었더라도 제목에 걸맞는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겠지』등등등..

그렇게 속아만 온 마음에 또 한번의 기대라. 음.


스토리, 상상력

우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이 영화는 스토리가 중심에 있는 영화가 아니다.

총감독인 김혁씨도 "드라마는 약하지만 비쥬얼은 인정을 받았으니 그쪽에 집중을 해서 봐 달라"고 직접 주문했으니 뭐 말 다했다. 한마디로 '스토리에 대해선 얘기를 꺼내지도 마'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싶다.

그 '화려한 비쥬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졸게 만드는건 바로 이 스토리니까. 애써 만든 '비쥬얼', 관객들이 조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돼버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김혁 총감독의 말처럼 우리나라엔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부재"하니 치밀하고 철학적인 줄거리 같은걸 기대하는건 무리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산 롤플레잉 게임의 캐릭터들보다도 훨씬 밋밋한 캐릭터라는 결과까지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애니메이션도 분명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의사소통이다. 깡통 로봇이 나오건, 태권V가 나오건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만든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건지 도대체 파악이 되지 않는 영화는 이미 영화쪽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역시나 이 영화는 이미 오토바이 경주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로봇 격투기 게임쪽에 가까와져 있다. 근데, 그 게임, 관객이 직접 하는것도 아니지 않는가.

여러분, 70분 동안 남이 하는 게임 옆에서 찍소리 안하고 구경할 자신 있으신가?

아마도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①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 자신만의 철학의 부재

② 그것을 영화화하는데 요구되는 상상력의 빈곤이 아닌가 싶다(아, 또다시 "손은 있는데
머리가 없다").

그게 없으니 "천룡팔부", "삼장법사의 봉인", "여덟개의 방위점"같은 뭔 소린지 모를 요상한 말들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들을 윤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퇴마록>에서 이걸 경험한 바 있다. 요즘 '한국적 블록버스터'를 자칭하는 영화들은 이런 경향을 띠고 있다.

과연 우연일까?


비쥬얼

그렇담 이 영화 최고이자 최후의 병기인 "비쥬얼"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홈 페이지나 포스터, 홍보전단에서 가장 강조되는건 "메카닉". 멋들어지게 디자인 된 로봇들이다. 어차피 사람이 주인공은 아니라는 얘기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가 팍팍 밀어주고 있는 "비쥬얼"은 각종 "메카닉"들의 화려한 움직임이다. 전반부 레이스 장면에서 오토바이, F1, 트럭, 후반부의 로봇들의 움직임의 묘사는 디지털 방식이 아니었으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연 이 "메카닉"들은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홍보 전단의 말대로 로봇들의 변신장면이나 출격장면은 박진감이 있는것이, 굉장히 볼만하다.

하지만 이 장면들을 뺀 나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있는 그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격을 안기는데는 실패한다.

왜일까? 그건 바로 움직임 때문이다.

영화속 모든 사물들은 공중에 방방 떠있는 듯한 느낌이고 육중한 "메카닉"들의 중량감(관성)은 전혀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의 움직임은 영화에 쓰기에는 너무나 허술한 것이다(특히 레이스 장면에서 코너를 도는 자동차들을 보라). 게다가 폭파, 파괴 장면에서의 불꽃, 연기, 파편들은 구름같이 둥둥 떠다닌다.

이런 기계들의 움직임이나 폭파씬의 허술함은 사람의 움직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훌륭하다. 영화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문워킹을 하며 로보트 댄스를 추고 있고, 말할때는 입이 얼굴에서 둥둥 떠다닌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도 관객들의 표정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있고, 손가락은 거미다리같다(징그러울 정도..). 로봇 만화라고 해서 사람까지 로봇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근데 "메카닉" 디자인과 변신씬에 쏟아부은 정성을 인물 묘사에 들였다면 영화가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우리 눈이 기대하는건 역시 로봇의 멋진 변신보다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정과 동작이니까 말이다.

3D 컴퓨터 화면을 2D 셀 화면같이 보이게한다는 "디지-셀(Digi-Cell)"이라는 기법, 사람을 더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위해 도입한거였다면, 그림의 질감뿐만이 아니라 동작이나 표정에도 그만큼의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 한가지, "요괴"들의 디자인이 너무 조잡했다는 것도 아쉬움이다.

<마징가 Z(マジンガ Z)> 시대에 조차도 많은 어린이들의 반감을 샀던 요괴 디자인의 조잡함은 그대로 계승돼 있다. '어차피 뽀갤꺼니까 대충 디자인하자'였을까? '행여나 나쁜 놈인줄 모르면 어쩌지'였을까?

근데, 그걸 아셔야 한다. 요즘은 어린이들의 눈도 상당히 '포스트모던' 하다는거. 나쁜놈은 흉칙하게 / 착한놈은 멋지게라는 이분법은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잘 안 통한다는거.


사운드

이 영화의 사운드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처음엔 돌비 스테레오로 소리를 뽑았으나, 영화 진흥공사에 돌비 서라운드 기계가 들어와서 서라운드로 업그레이드를 해 놓고 보니 서라운드 음향이 대사까지도 다 잡아먹더라.. 그래서 수정을 하다보니 1월 개봉예정이던 영화가 설날에 개봉되었다. 그래서 원래는 청소년들을 겨냥해 만든 90여분의 러닝타임을 수정해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인 70분 판으로 수정했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내용까지도 바꿔버린 사운드.

하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대사는 잘 안 들린다. 어린이 관객들이 이 영화의 그리 많지도 않은 대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상당히 의문이다. 누구의 책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관객들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대사 때문에 고생깨나 할 걸 각오해둬야 한다. 하긴 좀 심하게 말하면 의성어 ("어?", "앗!", "아아악!"..)와 "지국천왕 변 - 신 - !"등의 추임새가 정상적인 대사보다 더 많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음악 쪽은 어떤가.

"과거의 단순한 주제가에서 벗어나 록과 댄스리듬을 합성 각 세대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선사"하겠다는 의도는 참 환영할만하다.

하지만 음악은 그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음악은 귀에 들어와야 하는데(게다가 어린이 관객들을 겨냥했다면), 귀에 남아있는 멜로디가 없다. 가끔 간헐적으로 '마지막 승부'류의 음악이 배경에 깔린다는걸 빼면 음악이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물론 영화에 몰입돼서 음악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그런건 아니고.


또 한번의 실망, 희망

결국 또 한번의 기대는 또 한번의 실망으로 돌아왔다. 물론 별로 즐겁지 않은 기분이다.

그것은 젊은 애니메이터들의 참신한 시도의 결과가 꽤나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렸을때 극장에서 엄마 아빠의 무릎앞에 앉아 <로보트 태권 V> 주제가를 신나게 따라 부르던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더더욱 그렇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공이 들어갔는지(제작비만해도 15억원인데)는 짧은 지식에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지만, "힘들여 만든것"과 "한국에서 만든것"이 '좋은 영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새롭고 참신한 시도는 칭찬하고 응원하고 격려하되, 결과는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더 나은 영화 환경을 만들기위해 우리 관객들이 할 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도전하고 있는 새로운 시도는 그 자체로서 응원해줄 만한 것이다. 그리고 희망적이다. 그것의 결과는 현재일 뿐이지, 미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인사천왕>은 또 한번의 실망이자 또 하나의 희망이다.

그밖에

1. 이 영화 로봇들의 디자인은 <간담 ZZ(ガンダム ZZ)> 시대, 그러니까 85년, 86년의 일본 로봇 디자인과 상당히 흡사하다. <영혼기병 라젠카>의 "메카닉"도 85년의 <기갑계 가리안(機甲界 ガリアン)>을 흉내냈던걸 보면, 아마도 지금 한국의 "메카닉" 디자인은 일본의 80년대 중반을 흉내내고 있는 추세인것 같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고 방식이 일본 '아니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런 '꽁무니 쫒기'는 계속 되지 않을까 한다.

2.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시도'들 외에 좋았던 점

① 색상 선택이 세련되어졌다

② 획일적인 일본풍에서 벗어난 캐릭터 디자인(아마도 3D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③ 대부분의 배경화가 컴퓨터의 차가운(그리고 어색한) 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롯봇 격납고나 출격터널(?) 같은 인공적인 배경의 디자인은 멋지다.

3. 그런데, 박재동씨가 만들고 있다는 <오돌또기>는 왜 소식이 없는걸까? 제작비 마련을 못해서 제작이 중단됐나?

1999.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