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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를 보고 나서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오늘 잘하면 액션 영화판 <여명의 눈동자>를 볼 수 있겠군..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하고 그럴듯한 특수효과까지 합치게 된다면 정말 볼만하겠는데. 우선 한석규라는 배우, 작품 선택하는데는 안목이 있는 배우니까, 시나리오도 탄탄할꺼다.. 야, 그럼 <퇴마록>의 볼거리에 우리 현실하구 맞아 떨어지는 소재로 만든 잘 짜여진 이야기가 결합한다 이거지? 남북한을 오가는 첨단 첩보액션이라..』

25억이 넘는 제작비, <넘버 3>의 법통을 이어받은 호화캐스팅, 3년간의 시나리오 작업, 남북분단을 다룬 우리식의 첩보 액션 등등등..

<쉬리>는 느끼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살집빵빵한 궁둥이에 질식하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하나같이 "우와, 죽인다"를 일제히 보도하는 신문 보도에 의해 확신으로 굳어졌고.

<퇴마록>을 보기 전의 기대도 이것과 비슷했지만, 이번 경우는 "한국적 블록버스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호소력 강한 이야기에 주력"했다니 기대는 확신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우선 약 5분 정도 계속되는 도입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니,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그건 미국영화 수준의 엄청난 특수효과 때문이 아니다. 북한의 특수부대 '특수 8군단'의 훈련장면을 무겁게 가라앉은 색조로 속도감있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 도입부에서 군더더기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8군단의 장교('박무영')역을 맡은 최민수가 언뜻언뜻 비치기 시작할때 객석에서는 "오..(제법인데)"하는 소리가 군데군데 터져 나오지만, 그도 나중에는 잠잠해진다. 그만큼 <쉬리>의 도입부는 관객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 비하면 <퇴마록>의 도입부(<퇴마록> 최고의/최후의 명장면)는 맛배기 정도다.

'이런게 진짜 슬래셔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피칠갑을 하는 잔혹한(이라기보다 목숨건)훈련과정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건, 관객들이 얼마든지 수긍할만한 세부묘사와 연기,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군더더기 없는 촬영과 편집의 힘이다. 오케스트라의 스트링 섹션이 연주하는 비장하고 스케일 큰 음악도 한 몫을 했고.

『야, 역시 기대한 보람이 있군. <퇴마록>의 쓰라린 교훈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면 그런건 잊어도 되겠는걸.』

하지만 웬걸.

최민식과 김상미(8군단 요원 '수'역)가 끌어가는 북한에서의 훈련 장면이 끝나면, 한석규("비밀정보기관 O.P" 요원 '유중원' 역)와 송강호(유중원의 동료 '이장길' 역)가 끌어가는 남한에서의 '기동타격' 장면이 바톤을 이어 받는다.

자동소총과 적외선 안경으로 무장한 '대원'들이 불하나 안켜져 있는 선박에 침투하고, 이것을 핸드헬드 카메라가 쫒고, 그 배경으로 무전기 소리, 가쁜 숨소리가 깔리고.. 이런 '기동타격' 장면은 이미 <퇴마록>에서 질리도록 본 장면이다. 신선하다면 무기가 엄청 좋아진 거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한석규가 장비 다 갖추고 '본격 액션'하는 것도 신선하다면 신선하달수도 있지만.

그렇게 '액션' 장면들이 등장한 후, 곧바로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축인 사랑 이야기가 바톤을 이어받는다. 강제규 감독의 말에 따르면 "액션 51 사랑 49". 바로 그 "49"를 이루는 주인공 유중원과 그의 애인 이명현(김윤진 분)의 사랑얘기는, 이 영화를 내내 지배하게 될 소품인 수족관 속 열대어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과 어디서 많이 보던 설정들의 짬뽕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명인 씨가 한겨레 신문에서 말하던 "탄탄한 구성"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철저한 장인 정신"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주연급 배우들과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의 "나무랄데"가 어딨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와 이 영화에 대한 신문기사들에 가졌던 "신뢰감"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시나리오

우선 가장 문제가 되는것은 역시 시나리오다.

2년간이나 공을 들였다는 이 시나리오. "헐리우드 첩보 액션물과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당연하지만 많은 한국 영화들이 무시해 버리는 인식에 기초해서 쓰였다는 건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시원함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나온 "남북분단이라는 테마"는 테마가 아닌 소재로 머물 뿐이다. 액션과 테마 "둘 사이의 균형을 잡아가"려고 노력했다지만, 이 영화를 압도하는건 단연 액션이다(그 '압도적 액션'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얘기하도록 하자).

이명인씨가 "탄탄"하다던 그 구성은 다른 한국적 블록버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구멍투성이다. 그리고 여전히 진부하다.

옥상위의 저격범은 '날 잡아 잡수'하며 온몸을 노출시키고,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져도 뉴스에 한 줄 나지 않는다. <쉬리>의 현실묘사는 이런 식이다.

"신소재 액체 폭탄 CTX" 탈취는 극중 대사와는 달리 전혀 "치밀"하지 않고, 그 중요하다는 폭탄의 수송과정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거의 택배수준. 그리고 그 폭탄을 가지고 시내 곳곳에 설치해두고 O.P를 협박하는, 그리고 맛보기로 터뜨리는 악당이라는 설정은 영락없는 <다이하드 3>다. 폭탄 생김새마저도 말이다.

수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작 중요한 '마지막 거사'를 하는 적군과 그걸 유일하게 알고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이라는 설정 또한 <다이하드> 시리즈의 그것이다. 물론 그런 설정들이 "매끄러운 관습에 안주"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관습에 안주"만 했을 뿐이지 결코 "매끄"럽지는 않다.

그리고 도대체 그 O.P라는 기관의 요원은 두 명(유중원과 이장길)밖에 없는지, 둘이서 이 엄청난 사건을 모두 해결하려고 발바닥에 불이 난다. 상관이 하는 일은 앉아서 명령 아니면 질책이다. 그러니 기관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한다는 어디서 많이 본 (<엑스 파일>) 설정은 긴장감을 주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테마" 는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개인적인 "액션"에만 머무를 뿐이다.

또한 이 영화가 내세우고 있는 액션과 결합된 멜로 또한 별로 재밌지 않다.

왜? 모든 것이 "관습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긴장을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인 '저격수 이방희의 비밀'은 그렇기 때문에 힘을 잃는다. '뭔가 특이한게 있을꺼야'라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예측가능한 이런 '비밀'에 서스펜스나 호기심이 끼어들 틈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반전'에 누가 충격을 받겠는가?

그리고 감독은 결국에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남북분단이라는 테마"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사용하려 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만이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없는 액션씬 뒤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허겁지겁 등장하는 유중원과 박무영 통일 논쟁은 생경하기만 하다. 아니, 외려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되면 등장인물들의 인간적인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휴지를 씹는듯한 뻑뻑한 느낌을 주는 대사들은 사소한 문제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긴 좀 심하게 말하면 등장인물들이 줄거리 해설하는 나레이터같이 느껴지기까지하니 사소한 문제가 아닐수도 있겠다. 분명한 건 등장인물들을 하나같이 밋밋하게 만들어 놓은데는 시나리오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나마 개성을 부여받은 등장인물은 멍청한 낙하산 O.P 요원 어성식(박용우 분) 뿐인것 같은데, 그 개성 또한 예외없이 "매끄러운 관습에 안주"하고 있어, 매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전체적인 구조 또한 제대로 된 복선이나 변변한 반전도 없이 줄줄이 줄거리들을 나열하는 일방통행 구조를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라운드, 스테레오, 모노 중에서 모노와 스테레오의 중간 정도다.

물론 그 줄거리들은 앞날이 뻔이 보이는 줄거리다. "매끄러운 관습"대로만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예측가능이다. 아니, 복선이란게 있긴 있었던 것 같다. 금붕어, 수족관, 이런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걸 복선이라고 얘기해야하나?

이명인씨 왈 "그 장르적 골격은 할리우드적 완성도를 지향하며"라고 했는데 "할리우드적 완성도"를 너무 우습게 봤다. 대부분의 "할리우드적" 영화들은 웬만큼 기본이 되어있는 영화라면 영화 곳곳에서 복선을 깔고 그걸 나중에 중요한 실마리로 써먹지 않는가? 정말 잘 된 "치밀"한 영화라면 영화 속 한 장면 한 장면들이 모두 씨줄날줄처럼 엮여 전체적을 잘 짜여진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 영화에 그런 "치밀"함이 있었던가? 내가 보기에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시나리오가 백배는 더 "치밀"하다. 그런데 도대체 한겨레 신문 고명섭 기자님은 이 영화의 어디를 보고 "시나리오가 치밀하다"라는 말을 한 것일까? 그 기자분 인터뷰 한 번 해보고 싶다.

이런 설정에 대해 "이루지 못하는 사랑"과 "잔혹 취향"을 "결합"함으로써 "국내 액션영화의 전통을 깼"다는 이명인씨의 말은 명백히 잘못된 언급이다. 우리나라 "깡패 세계"영화 중에 멜로와 결합되지 않은 작품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루지 못하는 사랑"과 "잔혹 취향"이 없는 "깡패 세계"영화가 있었던가?

심지어는 "깡패 세계"영화가 아닌 <퇴마록>마저도 이런 설정을 따르고 있는데. <쉬리>의 '액션과 멜로'라는 설정은 이명인씨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최초도 아니고 따라서 신선하지도 않다.

연출, 액션, 특수효과

사실 위에서 얘기한 것들 외에도 시나리오의 문제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만약 이 시나리오도 "매끄러운" 연출이 받쳐주었다면 크게 흠이 되지 않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관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속아줄 수 있도록 연출이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쉬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참고한 많은 영화들 사이를 계속 방황하는 연출이다. 물론 그 영화의 대부분은 헐리우드 영화들이다.

우선 이 영화가 참고한 영화 리스트만 뽑아보더라도 꽤 긴 목록이 나온다.

위에서 얘기한 <다이하드 3>는 말할 것도 없고, <중경삼림>, <엑스파일>, <양들의 침묵>, <첩혈쌍웅>(≒<트루 로맨스>)같은 영화들이 <쉬리>라는 이름의 짬뽕의 재료들이다.

물론 표절시비 같은걸 걸자는 건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참고한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툭툭 내뱉듯 던져지기 때문이다. 마치 그동안 감독이 재밌었다고 생각한 장면이나 설정들은 모두 이 영화에 집어 넣겠다고 작정한듯이 말이다.

하지만 소화불량이다. 그리고 이 소화불량 장면들은 그리도 잘됐다는 액션과 특수효과 장면으로 연결/땜빵된다.

이 영화의 액션/특수효과를 헐리우드 영화의 것들과 비교하자는 건 아니다. 그런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걸 어떤 기자, 평론가들처럼 우리나라 영화들에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다른 얘기지만, 난 이 기자, 평론가들이 헐리우드 액션 영화들을 그 훌륭한 특수효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씹으면서 우리나라 영화가 그것과 좀 비슷한것 하기만 하면 왜 이성을 잃고 "짱이야!"를 합창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니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순정. 니가 하면 물량공세, 내가 하면 "장인정신"인가. 그리고 이들의 이율배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쨌든, 이 얘기는 뒤에서 계속하기로 하고 계속해보자.

문제는 그 "장인정신"이 깃들었다는 액션/특수효과 장면들이 영화와 따로 놀거나, 영화의 리듬을 해치거나, 영화를 난해한 것으로 만들거나, 영화를 황당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선 모든 액션(수색, 총격, 도주 등등등) 장면들은 거의 무조건 핸드헬드로 촬영된다.

액션장면마다 일부러 만든 것 같은 핸드헬드의 흔들림이 들어간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량의 부족을 촬영의 센스로 메우겠다는 생각인데, 그 의도는 그 자체만 보면 성공한 것 같다.

확실히 액션은 격렬하고 속도감 있게 표현되며, 이 정신없는 촬영에 정신없는 편집이 가세되면 그 격렬함과 속도감은 배가 된다. 그럼 됐지 문제가 뭐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액션도 분명 영화 장면 중의 하나이고, 그 안에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정보나 줄거리들이 들어있다는데 있다. 격렬하고 멋진 그림에 대한 집착(이명인씨가 "장인정신"이라고 부른)이 극의 흐름을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도중에도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죽기도 하고, 중요한 비밀이 드러나기도 하고, 어떤 등장인물은 천신만고의 탈출에 성공하고 등등등의 사건은 계속 벌어지는데(이것도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고서야 파악이 된 것이다), 카메라는 아랑곳 않고 주리줄창 핸드헬드, 편집은 주리줄창 총쏘고 불꽃 튀기고의 반복이다.

아무리 액션 도중이라도 중요한 씬('수'가 자폭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총격전에서 '박무영'의 부하들이 죽어가는 장면 등)에서는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갈 수 있도록 장면구성을 한다는게 이 영화가 그리도 도달하고 싶어했던 "할리우드적 완성도"의 기본 아닌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필사적으로 경기장의 전원을 끊으려는 유중원, 그 등뒤에 칼을 꽂으려는 박무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이다(사실 다음 장면이 뻔히 보이지만).

그런 박무영을 쏘는건 찐따같은 신참 요원이다. 이 장면의 화면구성 순서는 영화가 그렇게도 도달하고 싶어한 헐리우드의 "매끄러운 관습"을 따라갔다면 [A : 유중원, 그 뒤에 칼을 꽂으려는 박무영] ⇒ [B : 거의 꽂기 일보직전에 총성과 함께 쓰러지는 박무영] ⇒ [C : 박무영의 뒤에서 아직도 그를 겨누고 있는 신참 요원] 의 순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쉬리>의 "매끄러운" 영화문법의 세계에서 이 장면의 순서는 A ⇒ C ⇒ B이다. 그러니 김이 빠지고 극적인 맛이 살지 않을 수 밖에.

이 영화의 장면구성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이게 설마 '헐리우드 영화 문법에 반기를 들기 위해' 그런건 아니겠지. "할리우드적 완성도를 지향"하며 "관습에 안주하"는 이 영화가 말이다.

어쩌면, 극적인 감정의 전달같은걸 바라는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장면구성을 했어야한다. 이건 모든 상업영화들이 기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핸드헬드는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영화계는 돈이 없단 말예요. 그래서 액션 장면의 빈틈은 이렇게 메꿔야 한단 말예요.' 그 빈틈을 메우는 아이디어는 핸드헬드 밖에 없었던거고. 그래서 감독은 웬만한 영화 서너편 이상 만들 만큼의 제작비도 모자라서 "제작비가 더 있었더라면" 이라고 푸념을 하는 것이고.

내 생각으로는 "제작비가 더 있었더라면" 더 정신없는 영화가 나올뻔 했는데. 7천만원 짜리 수족관 깨버린 것도 모자랐나보다. 물론 이 깨져나가는 수족관을 두고 '이명현'에 대한 믿음과 순수성이 파괴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하겠지만, 그 진부한 상징에 7천만원씩이나 썼어야 하나.

게다가 그 기동타격대 장면도 한두번이고, 총격전도 한두번이다. 멜로 장면이 아니면 거의 예외없이 이 정신없는 액션 장면들이 계속되고, 관객으로선 기지개를 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퇴마록>의 바톤을 이어받는 그 지루한 동어반복은 나름대로 "실감나는 특수효과"가 쓰인 액션 장면을 하품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미니어쳐를 사용한 백화점 폭파장면 같은 것도 특수효과 자체로는 좋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 보다도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연출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미국에서 신기한 무기들 수입하고, 두달씩이나 걸려 미니어쳐 만들고, 쓸데없이 삼성 로고 대문짝 만하게 찍힌 헬기 띄울 시간에 장면구성에 더 신경써야 했다. 애써 "장인정신"으로 떼돈 들여 만든 액션 장면들은 눈 위로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지,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백화점 폭파 장면에서 몸에 불이 붙어 옥상에서 떨어지는 소방관은 거의 스카이 다이빙을 하듯 공중에서 허우적거린다. 디립따 물량 쏟아붓는 것 보다 이런 사소해보이는 세부적인 연출을 제대로 하는 것이야 말로 "상업적 성실성"이다. 돈 많이 들여 "디테일"을 위해서 여기저기 자문 구하고, 무기 수입/임대하는 것이 이명인씨가 말하는 "상업적 성실성"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강제규 감독의 "제작비가 더 있었더라면"이라는 언급은 뭔가. 아마도 <타이타닉> 제작비 정도가 있어야 되나보다. 주어진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최고의 효과를 뽑아내는 것이 영화 제작의 기본이라는 것을 잊었을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부르스 윌리스를 썼더라면'이나 '디지털 도메인이 특수효과를 했더라면' 같은 푸념이 나오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다. 결국 이 얘기는 감독의 의사와는 무관하게도, 아이디어와 연출력의 부족을 예산부족으로 돌리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연기

그나마 이 영화를 살리는 건 한석규와 최민식의 연기다.

특히 최민식의 연기는 아슬아슬한 시나리오를 간신히 구제하고 있다. 한석규도 여전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애인도 친구도 없는 냉정한 O.P 요원의 이미지를 살리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그리고 <초록 물고기>, <은행나무 침대>에서 익히 보아온 연기를 재탕시키는 연출에 의해 신선함도 떨어진다.

주연급 세명중 가장 문제는 송강호인 것 같다. 그는 영화 내내 엘리트 O.P요원 이장길을 연기하는것에 대해 굉장히 어색해하는듯 하다. 가뜩이나 밋밋하고 개성없는 인물인데 설상가상로 대사까지 밋밋하고 성급하게 처리된다.

감독의 의도는 이장길을 "사람냄새가 가장 짙은 요원"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장길이 가장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인물, 즉 '줄거리 나레이터'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승연과 방은희 그리고 권민중을 반죽해놓은것 같은 이미지의 김윤진은 여주인공 이명현역을 무난하게 소화하긴 했지만, 감독이 "매우 고심해서 창조"한 그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는 실패한다.

그리고 그녀가 겪는 갈등은 역시 귀순용사 인터뷰 수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밋밋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마지막의 "이룰 수 없는 사랑"도 그닥 슬프거나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영화는 그 어설픈 멜로에서 감동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감동을 받아야 할지 민망/난감하기만 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영화 최고의 연기는 CTX의 원리를 설명하는 국방 과학 연구소의 연구원의 연기였던것 같다. 그 시금털털하고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이것이 리얼리티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게 했으니까. 그 연기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김성한 씨가 보여준 훌륭한 연기와 맞먹는다.

그럼 최악의 연기는? 브리핑 장면에서 유중원에게 질문을 던지는 여자 상관 아줌마. 이 아줌마보다 연기 잘 하는 아줌마를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수족관 깰 돈 조금만 아껴서 좀 괜찮은 연기자 쓰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재능이라는 걸 그 아줌마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다.

언론의 이율배반

<쉬리> 그 자체보다도 더 문제인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언론(신문)의 보도 행태다.

가장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평소 헐리우드 영화의 물량공세와 획일적인 관습에 대해 거품물며 공격을 하다가도 이런 영화들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우리나라 영화들만 보면 거품물며 환호하는 평론가들과 기자들의 이율배반적인 논조이다. 이들이, 진정 원하는게 뭘까?

그 대표선수로 <쉬리>에 대해 전례없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 한겨레 신문의 논조를 살펴보자.

그 중 '이명인의 영화 관람석'에서의 이명인씨의 논조는 아주 압권이다.

이 글은 서두부터 "그러나 세계정세의 재빠른 흐름으로부터 고립된 한반도에선 새로운 밀레니엄의 구상기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용 영화는 가능할 수 있다"같은 횡설수설로 오프닝을 연다.

이 횡설수설, 이해는 잘 안되지만 그런대로 앞의 문장을 바탕으로 해서 해독해 보자면 "한반도 영화에서만 가능한 토종소재"인 "전쟁, 분단, 통일, 국가 안보, 반공..."등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민첩"하다는 얘기를 횡설수설 버전으로 다시 한거 같은데. 그렇게 이해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리얼리티다."라는 결론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여튼 이명인씨의 인식으로는 "전쟁, 분단, , 통일, 국가 안보, 반공..."같은 소재만이 "토종소재"인가 보다. 이 "토종"이라는 말도 상당히 웃기지만, 그렇다 치고, 계속해 보자.

소재만 "토종"이면 뭐하나? 이 영화는 전혀 "토종"스럽지 않다. 그리고 "토종"스러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건 이명인씨도 알고 있는바다. "그 장르적 골격은 할리우드적 완성도를 지향하며..".

따라서 이명인 씨 왈, <쉬리>가 "내어놓"았다는 한국영화의 "하나의 방향"은 "토종" 쪽으로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 영화의 방향이 어디에 맞춰져 있길래 그렇게 환호하는 것일까?

혹시 "새로움에 대한 고민과 성실함으로 장르의 토대를 구축하고 완성해 간 과정은 지금의 장르 획일화와 편중 현상에 제동을 걸어줄만"하기 때문에 환호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명인씨, 환호의 대상을 잘못 골랐다. 그 환호의 대상은 <마요네즈>가 되었어야 훨씬 더 옳았다. 그 내용과 장르로 볼 때 지금 개봉중인 한국 영화들 중에 <마요네즈> 만큼 독창적인 영화가 있었던가?

<쉬리>가 있기 전의 수많은 액션 영화들(물론 멜로를 곁들인)은 다 뭔가. 그리고 그 첩보 액션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않았다 뿐이지 미국에서만 매년 십수편씩 나오는 영화가 아닌가? 통일, 분단현실이 있다고? 그게 이 영화를 "토종"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건 위에서 장황하게 얘기한 바와 같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블랙레인>을 보라. 일본의 "토종소재"인 야쿠자를 다뤘다고 해서 <블랙레인>이 일본인들만이 만들수 있는 영화였는가? 그리고 <블랙레인>의 어법과 <쉬리>의 어법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블랙레인>이 <쉬리>보다는 훨씬 더 동양적인 냄새가 나는 동양 "토종"에 가깝다.

게다가 "장르 획일화와 편중 현상"이란것이 어디 지금의 멜로 영화에만 국한된 문제인가. 그리고 그 "획일화"의 문제가 어디 장르에만 국한된 문제인가.

내가 보기에 진짜로 고쳐져야 할 "획일화"는 영화평론가들이나 기자들의 "획일"적인 논조가 아닌가 싶다. 모든 영화를 장르라는 범주로 뭉뚱 그려서 각 개별 영화들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 그 "획일"적인 논조중의 하나이고('남녀 주인공이 나와서 사랑 얘기하면 그건 모두 멜로니깐 볼 필요도 없어!'), 헐리우드 특수효과를 흉내낸 한국영화들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관대한 것이 또 하나의 "획일"적인 논조이다(이들의 인식으로는 영화의 상업적 경쟁력을 키워주는 건 특수효과와 액션밖에 없나보다).

그리고 그 "획일"적인 사고방식의 중심에는 '우리영화 VS 헐리우드'라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양분법이 "획일"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이쯤되면 이명인씨가 무엇에 그리도 환호하는지 알만하다.

이명인씨 자신도 왠지 꺼림칙했던지 "그것은 바로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접근하지만 좀처럼 완성시키기는 힘든 상업적 성실성이다"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빙빙 돌려 얘기하고 있다. 이 얘기는 다름아닌 '우리도 헐리우드 영화를 흉내낼 수 있다는데 감동 받았다'는 얘기다. 이명인씨에게 "상업적 성실성"이란 헐리우드 영화들을 그럴듯하게 흉내내주는 성실성에 다름이 아니다.

만약 "남북분단 현실"만 살짝 바꾼, <쉬리>와 똑같은 미국 영화 또는 홍콩 영화 등등이 있었다고 치자. 이명인씨 이 영화에 대해서 이리도 환호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오매불망 헐리우드를 짝사랑하시는 분들이 스크린쿼터제 문제만 나오면 갑자기 180도 유턴을 해서 "나는 한국적인 영화가 너무나 보고 싶어라!"를 외친다. 그리고 "헐리우드의 뽀개는 영화만 보면 죽어버릴 것 같아라!"를 외친다. 한국영화의 헐리우드화에 이리도 환호하시는 이 분들이 말이다. 이런 이율배반이 버젓이 신문이라는 멀쩡한 지면을 타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건 앞서서도 얘기했지만 '한국영화 VS 미국영화'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양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그들의 인식 덕분이다.

물론 나는 스크린 쿼터제는 마땅히 지켜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한국인 배우가 나오는 한국산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건 헐리우드가 돈 한 번 벌어보려고 돈놓고 돈먹기식 영화들을 만들어낼 동안, 헐리우드의 돈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다양한 얘기들을 가장 친근한 어법으로 해 줄 가능성을 가진 영화가 바로 우리 영화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쿼터의 문제가 국제적 연대로 확대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그 다양성 만큼의 가능성을 자본의 힘과 논리로부터 지키기 위해 스크린 쿼터제가 필요한 것이지, 무조건 '한국'영화이기 때문에 스크린 쿼터제는 지켜져야 한다는 논리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크린 쿼터 사수위의 말처럼 "한국영화와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려면 자신의 생산물에서부터 그러한 자존심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매번 만들어내는 영화들이 헐리우드 뒤꽁무니만 쫒는 영화이면서 "한국영화와 문화의 자존심"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겨레 신문이나 씨네 21같은 잡지들 또한 이런 이율배반적인 논조에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면 한국영화, 그리고 영화언론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사족 마디.

<퇴마록>이나 <쉬리>에 대한 언론의 평의 보면, 이 글들을 쓴 평론가와 기자들은 우리나라 관객들을 국산 특수효과 못봐서 환장한 사람들 쯤으로 생각하고 있나보다. 아니면 자신들이 그렇던가.

1999.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