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완벽했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Their plan was perfect... they weren't.)"

                                    - <수어싸이드 킹>의 헤드 카피

1.

아래는 얼마전 라디오에서 듣게 된 멘트다.

"제가 아는 한 영화감독에게 영화를 만들때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영화의 첫 20분이라고 하더군요. 영화가 시작된지 20분 안에 관객들을 사로 잡고, 그 힘으로 나머지 영화를 끌어나간다는 것이죠."

이 프로의 구성작가가 얘기했던 "제가 아는 한 영화감독"은 혹시 <수어싸이드 킹(Suicide Kings)>의 감독 피터 오팰런(Peter O'Fallon)이 아니었을까.

2. 머리 - 오프닝, 그리고 "첫 20분"

관객의 귀에 말 그대로 '작렬'하는 인더스트리얼 테크노(이런 말이 있다면)와 검은 스크린을 찢어내듯 가르는 흰 선들이 새기는 크레딧. 한 순간에 관객들을 그 압도적인 음울함으로 몰아넣었던 <세븐>의 오프닝을 기억하신다면 <수어싸이드 킹>의 오프닝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MTV/광고 감독 출신의 오팰런은 이 오프닝으로 그 바닥 최고의 스타 데이빗 핀처에게 존경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도전장을 내민 것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 스타일로만 보면 <수어사이드 킹>은 '올해의 오프닝 상' 감이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감독은『 납치된 친구 여동생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겁대가리 없는 하버드생 4명이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은 암흑가의 전설을 납치해서 의자에 꽁꽁 묶어놓고 몸값을 요구한다..』는 꽤나 재미있는 얘기를 풀어가가기 시작한다.

이 얘기를 우리나라 버전으로 바꾸면 『 서울대생 4명이 이제는 은퇴한 양은이파 보스 조양은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한다..』 정도가 될텐데, 아마도 우리나라에 왔으면 꽤나 우울한 영화가 되었을 법도한 이 줄거리를, 오팰런은 오바하지 않는 경쾌함으로 풀어나간다. 게다가 은퇴한 마피아 보스 찰리(크리스토퍼 워큰 분)는 우리나라 조폭 아저씨들과는 달리 우아하고 젊잖기 그지없는 신사로 묘사되니, 칙칙함이나 경박함과의 거리두기에 꽤나 신경쓴 듯한 감독의 손길이 느껴진다.

납치 계획, 범생이들과 조폭 대장의 만남, 그리고 '거사'까지의 이야기는 역시나 <쉘로우 그레이브>나 <바운드>를 연상시키는 스타일(그 '요즘 젊은감독 느와르' 스타일)로 무리없이, 그리고 흥미롭게 풀어져나간다.

특히 찰리를 납치하던 벤츠가 터널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장면은 총질과 폭파씬 없이도 얼마든지 박진감있고 긴박한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우리가 잊고 있는 평범한 사실을 보여준다.

자, 여기까지가 관객과의 승부의 분수령 "첫 20분"이다.

물론, 지나치게 스타일을 의식해서 쓸다리 없는 범행 리허설(마네킹을 갖구 하는 리허설이다..)장면을 억지로 교차편집 해넣었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지만, 감독은 "첫 20분"의 승부를 성공리에 마친다. 영화는 관객을 게임속으로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그 "20분"의 힘이 얼마나 갈 것인가이다.

초전박살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용두사미가 될 것인가.

3. 몸통 - '출혈보다 지루한'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승부의 결과가 후자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4명의 범생이 납치범들은 찰리를 친구 아버지의 별장으로 끌고가 손가락을 자르고 '돈내놔/싫어' 게임을 시작하는데, 모든 도박처럼 이 게임 역시 밀폐된 공간(별장)과 한정된 시간(하룻밤)에서 벌어진다.

물론 이 게임은 실제로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게임이다. 하지만 영화가 긁은 판돈은 "처음 20분"에 딴 것이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 나머지 시간은 첫판에 딴 판돈과 갖고 있던 밑천을 곶감 빼먹듯 까먹는 시간이 되어버린다. 역시 첫 끗발이 개 끗발.

의자에 꽁꽁 묶인 찰리가 마취에서 깨어 눈을 뜨는 시점샷부터 시작되는 본론 - 즉 얼치기 납치범 5명의 좌충우돌, 노련한 찰리의 심리적 교란 작전, 찰리를 구하려고 열심히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찰리의 오른팔 로노(데니스 리어리 분)의 활약(?), 결국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 망가지는 납치범들의 좌절까지 - 은 그닥 재미도 없는 수다와, 돌출적인 에피소드의 연속이다.

영화는 순식간에 판돈 몽땅 잃고 어디선가 푼돈을 구해 다시 판에 들어오는 꾼처럼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한 에피소드의 약발이 떨어지고 나면, 또 어디론가 나가 새 에피소드를 구해오고, 또 약발이 떨어지고.. 이런 식이다. 하지 만 그런 식으로는 어떤 도박꾼도 딸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게임은 지루해지기 쉽상이라는 것도.

5명 중 배신자가 있음을 알려오는 찰리의 오른팔, 비타민K(비타민'K'도 있었나)가 없어 출혈로 죽을지도 모르는 찰리, 목숨보다 아끼는 가오리 가죽 구두가 진창에 빠지자 방금전까지 적선해주던 거지를 죽이려고 하는 로노, 느닷없이 별장 순찰을 나온 관리인, 여동생을 유괴한 두 명의 사이코(하지만 그들의 사이코적인 성격에 설득력은 없다), 그들과 공모한 배신자의 시점샷 등등..

이 자리에서 모두 얘기할수도 없을 만큼 에피소드들과 인물의 '개성'은 열심히 나열되지만, 이것은 관객을 어떤 곳으로도 데려가지 못하고 거의 제자리를 맴돈다. 마치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두꺼운 젤리로 된 벽이 놓여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감독에게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도무지 두서없는 편집과 두서없는 인물 묘사이다. 아마도 꽤 괜찮았던 것 같은 시나리오는, '개성있는 캐릭터 묘사'에 대한 감독의 지나친 집착과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다 외려 자신이 그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 감독의 과욕 덕분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다가 되어버렸다.

찰리가 5명의 아이들에게 카드놀이를 하자며 뱉는 대사는, 사실 필자가 영화에게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얘들아, 출혈로 죽기전에 지겨워서 죽겠다."

4. 꼬리 - "<유주얼 서스펙트> 이래 최고의 반전"?

하지만 영화는 막판 뒤집기를 준비해두고 있다.

오프닝에서는 데이빗 핀처, 도입부에서는 대니 보일과 워쇼스키 형제, 본론에서는 관객의 인내심에 도전장을 던지던 감독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5명의 범생이들이 카오스에 빠지는 부분부터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도전장을 던진다. '100년 영화사상 최고의 반전'이라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창조자 브라이언 싱어에게 말이다.

그리고 사실 이 마지막 남은 한 판이야 말로, 사방에서 구차할 정도로 푼돈을 얻어가며 끈질기게 게임을 끌어 왔던 이유다. 영화는 이 한 판의 막판 뒤집기를 위해 그 많은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근데 그 결과는 어땠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의 손실은 어느 정도 보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이 던진 파워에는 감히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광고 카피에서 "<유주얼 서스펙트> 이.래. 최대의 반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본전의 80퍼센트 정도는 건지고 판을 끝낸 정도다.

5. 카리스마

그런데 이 막판 뒤집기의 힘은 시나리오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 영화 자체처럼 어느 정도는 얼이 빠져있는 것 같은 표정만을 보여주던 크리스토퍼 워큰이 드디어 뽑아든 번쩍번쩍 날이 서 있는 카리스마(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과장은 아니다)이다.

이 모습은 <킹 뉴욕(King of New York)>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푸른 빛의 카리스마가 아니던가.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의 영화도, 감독의 영화도 아닐지 모른다. 크리스토퍼 워큰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유주얼 서스펙트>와 <쉘로우 그레이브>, <바운드>를 적당히 짬뽕한 그저그런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워큰이 이 영화에서 그의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감은 이미 영화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커져버린 것이다.

마지막, 진짜 문제를 직접 자기 손으로 해결하고 돌아서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가 남겼던 여운보다는 엷지만, 어딘가 믿음직한 구석이 있는 여운을 말이다.

"카리스마는 완벽했지만... 연출은 그렇지 못했다"

6.

위 라디오 멘트를 보면 과연 지금은 시작한지 20분 안에 결판을 보겠다는 '악다구니'가, '좋은 첫인상'으로 미화되는 시대인가 보다.

그리고 미국영화, 한국영화 할 것 없이 돈 놓고 돈 먹는 영화들이 대부분 가분수꼴을 하고 있는 것은 역시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심지어는 5분도 채 안되는 예고편에서 보여줄 것 다 보여주고, 또 그 덕분에 장사가 되는 영화마저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 아닌가.

하지만 필자는 처음 영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할 무렵 보았던 영화들 (예를 들면 <바그다드 카페>같은)이 보여주었던 마술을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에는 너무나 짜증스럽고, 추하고, 지저분해 보이던 주인공들이 점점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변해가던 그 마술을.

여자는 한 달에 한 번 마술에 걸린다지만, 지금 영화팬들은 한달은 고사하고 일년에 과연 몇 번이나 이런 마술에 걸리는 걸까. 그리고 과연 십년 후에도 우리는 이런 마술에 걸리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그리쉽게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있을까.

[ 덧붙여서 ]

* 이 영화를 둘러싼 최고의 미스테리는 왜 제목을 '자살의 제왕들'이라고 정 했는가하는 점이다. 물론 범생이 4인조가 한 짓은 자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한 일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자살의'에 이은 '제왕들'은 또 뭔가. 더 좋은 제목은 정말 없었던 걸까...

* 어쨌든 감독이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살리려고 무진장 애쓴 것은 높이 사줄만한 점이다. 그것이 성공했던 못했던 간에 말이다. 이것이 오팰런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된 하나의 이유다. 크리스토퍼 워큰이 고른(또는 크리스토퍼 워큰을 고른) 감독이니 가능성은 있겠지.

* 크리스토퍼 워큰은 그리 호감이 가게 생긴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그리고 그 매력은 다분히 중독성이 있다.

그는 <애니 홀>, <디어 헌터>, <천국의 문>, <홈보이>, <배트맨 2>, <트루 로맨스>, <펄프 픽션>, <라스트 맨 스탠딩>, <마우스 헌트>, <개미>같은 '잘 나가는' 영화의 조연(또는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정작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역시 아벨 페라라 감독과 만든 작품들(<킹 뉴욕>, <어딕션>, <퓨너럴>, <뉴 로즈 호텔>)이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페라라와 처음 작업하게 된 <킹 뉴욕>(비디오로 출시되어 있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납치된 여동생의 오빠 '에버리' 역을 맡은 헨리 토마스(Henry Thomas)는 잘 알고 계시다 시피 [E.T.]의 '엘리엇'역을 맡았던 그 꼬마다. 드류 배리모어가 그렇게 변하는 동안, 헨리 토마스는 이렇게 변했군.. 흠..

1999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