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진화한다. 폭력도 진화한다. 증오는 폭력을 부르고, 분노는 다시 폭력이라는 자식을 낳고, 그 폭력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분노를 낳는다. 사적 유물론의 세계에서 역사가 나선형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세계에서는 '나선형'으로 발전하는 '증오'가 있다.

1. 증오의 진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형 덕분에 얼치기 네오 나치주의자가 된 중학생 '대니 빈야드(에드워드 펄롱 분)'의 독백과 회상을 따라 그 진화의 나선, 또는 진화의 나이테의 중심을 향해 파고든다.

먼저 대니가 작문시간 리포트로 제출한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대한 보고서'라는 얇은 껍질을 뚫고 들어가면, 그의 형 '데렉(에드워드 노튼 분)'의 증오가 세종로 이순신 장군상처럼 우뚝 서 있다. 왼쪽 가슴에는 나치의 철십자를 아로새기고.

대니의 <나의 투쟁> 리포트에 대한 응징으로서 엄격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교장이자, 두 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인텔리이자, 흑인인 '스위니 선생(에버리 브룩스 분)'은 그의 형의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요구한다. 이것이 거의 반강제로 대니가 형 데렉에 대한 회상을 시작하게 되는 사연이다.

흑백('흑'과 '백')화면으로 보여지는 그 회상(플래시백flashback)의 세계에서 그의 형 데렉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차를 훔치려는 흑인 둘에게 털끝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총알을 박아넣는 일이다. 그리고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온 대니가 하는 일은 화장실에서 맞딱뜨린 흑인 '양아치'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어주는 일이다. 이 댓구(또는 대조?)가 말하는 건 무엇인가? 결국 형 데렉과 동생 대니의 '증오(또는 신념?)'의 차이는 '총알'과 '담배연기'의 딱딱함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형 만한 아우가 없다'는 속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 또 진화의 나이테를 한 번 더 파고들 필요가 생긴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대니의 나레이션이 파고든 나이테의 그 중심에서 우리는 두 형제의 아버지의 일상적인 인종차별주의(이름하여 'Usual Racism'?)를 만난다. 그것은 태풍의 눈처럼 이 증오의 계보도 중심에서 조용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리고 폭력의 진화

이 중심에서 다시 돌아나가는 길은 그대로 폭력의 역사가 된다.

소방수인 아버지는 '흑인들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심약하던 고등학생 데렉은 머리를 빡빡밀고, 나치 문신을 새기고, '동지'들을 규합해 아버지를 죽인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을 응징하기 시작한다. 그 방법이 농구장을 걸고 흑인들과 하는 내기 농구가 되든, 한국인이 운영하고 불법 체류자들이 일하는 야채가게 습격이 되든.

그리고 어느새 네오 나치즘의 영웅적 행동대장이 된 데렉은 그 응징을 최고의 형태까지 끌어올린다.

즉 그것은 살인이다.

이 최고 형태의 응징을 끝내고 당당히(!) 경찰의 체포를 받는 데렉의 모습이 마치 순교자의 모습(아니면 예수의 수난?이라고 하면 신성모독이 될까요)처럼 그려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경찰차의 조명을 받으면서 그 스킨 헤드뒤로 깍지 낀 손에 수갑을 받을때 데렉의 모습은 영락없이 십자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포스터의 바로 그 이미지).

그 섬뜩하도록 자신만만한("봤지?") 냉소와 나치 철십자 문신만 없었다면 필시 성스럽게 느껴질 장면이다.

물론 이것은 이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를 성자로 그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네오 나치의 체포를 마치 '수난'처럼 그린 것에는 오직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난'이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데렉의 3년 수감 생활은 부활의 시간이다.

편견을 여과해주는 시간과 함께 그를 부활시키는 것은 다름아닌 폭력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폭력은 배신자를 응징하는 '아군'을 통해 온 것이다. 결국 데렉은 깨닫는다. '흑인'은 피부색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데렉은 부활하고, 그의 알몸을 용서하듯 적시듯 고속촬영된 샤워장의 물(바로 세례!)은 그의 부활을 완성한다.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그는 옛날의 자신을 닮아가려는 동생을 다시 빼내고('수렁에서 건진 내 동생'), 동생과 함께 방 안 한쪽 벽을 뒤덮고 있던 나치즘을 마지막으로 떼어낸다. 그리고 샤워기는 데렉에게 또 한번의 은빛 세례를 안긴다.

나선의 끝은 여기인가? 물론 아니다. 영화가 이런 대책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처음부터 '폭력의 나선' 등등의 얘기를 했을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영화는 마지막 폭력과 희생을 준비해두고 있다. 해피엔딩을 '잡치는' 모든 비극적 결말들이 그렇듯이 너무나 어이없는 이 희생뒤에 남아있는건 대니가 제출할 리포트('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결론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그리고 이 비극적 결론으로 영화가 준비해둔 폭력의 나선의 끝은 무한대로 향해 열린다.

3. 토니 케이 / 에드워드 노턴

사실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전략적 플래시백'을 걷어낸다면, 줄거리는 아주 간단한 것이 된다. 간단할 뿐만이 아니라 진부하다.

'한 에미애비도 몰라보는 네오 나치가 갖은 망나니 짓은 다 하다가 감방가서 개과천선해서 새 사람이 된다..' 이 런 줄거리가 진부하지 않은 것이라면, <별들의 고향>의 줄거리도 진부한 것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가 준비해 둔 지극히 관념적인 결론("증오는 폭력을 부르니 증오하지 말자")은 줄거리보다도 더 진부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소재나 주제나 줄거리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닌법.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98년의 또 하나의 발견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이 '진부함'에서 '발견'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사람 두 사람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감독 토니 케이(Tony Kay)와 데렉 역의 에드워드 노턴(Edward Norton)이다.

위에서도 잠깐씩 언급했지만 토니 케이는 이 영화에서 고속촬영과 광각렌즈를 그의 스타일의 축으로 삼는다. 그 중에서도 수 많은 장면에서 사용된 고속촬영은 아찔할 정도로 많은 얘기들을 담고 있다. 흔히 이렇게 한 스타일을 자주 사용할 때 그건 십중구 '남발'로 보이기 마련인데,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고속촬영은 그것이 사용된 거의 모든 장면에서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메이드 인 홍콩>에서 따 온것이 명백한 샤워 장면은 결코 '오리지널'에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속촬영이 광각렌즈로 만들어낸 널찍한 시야와 결합되면(인트로와 엔딩의 바닷가 장면, 집 앞에서 데렉의 엄마 도리스가 그야말로 무너져내리는 장면 등)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또 하나의 진부함으로 오해되기 쉽다고 생각되는데) 과거 장면에서 흑백필름을 사용한 선택 또한 감독의 '공허하지 않은 스타일'을 드러낸다. '끝간데 까지 간' 데렉의 인종주의와 흑백논리는 흑백필름 - 흑백필름은 색채를 없애기 때문에 명/암, 흑/백의 대조가 훨씬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상식을 적절히 이용한 - 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강렬하고 뚜렷하게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토니 케이는 이 영화에서 감독과 촬영을 함께 맡고 있는데, '과연 그럴만 했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 케이의 '스타일' 못지않은, 아니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에드워드 노턴의 광기어린 연기인데, <택시 드라이버>에서의 로버트 드 니로, <데드 맨 워킹>에서의 숀 펜, <쇼생크 탈출>에서의 팀 로빈스를 합쳐놓은 것 같다는 얘기는 별로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더 놀라운 건 그의 연기의 폭인데 누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네오 나치의 모습에서 얌전한 도련님(<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똑똑한 변호사(<래리 플린트>), 개념없는 도박꾼(<라운더스>)을 떠 올리겠는가. 그건 그의 '빠박' 헤어스타일 때문만은 분명 아니다. 어쨌든 에드워드 노턴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입장료는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4. 증오는 어디서 오는가?

마지막 장면 어린 데렉과 대니가 뛰어노는 바닷가의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 저녁놀처럼 전신을 적시는 여운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은 이 영화가 "증오는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설득력있게 그리고 있지만, 그 증오 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또는 못하기?) 때문이다.

대니는 형 데렉이 가르쳐 준 글을 끝맺는 방법 - '스스로 멋있게 마무리지을 자신이 없으면 멋있는 말을 인용해라' - 으로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리포트를 끝맺는다. 필자 역시 마무리에 자신이 없다는 면에서는 대니와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졸필을 인용으로 마치겠다.

어쩌면 이 글이 <아메리칸 히스토리 X> 가 남긴 아쉬움을 보상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내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
"우리의 적을 향해 쏴라!"
내가 그들의 적을 향해 쐈을 때
그건 나의 형제를 겨눈 짓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저쪽엔 내 형제가 서 있다는 걸.
굶주림은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는 것
나는 행진한다. 형제의 적이자
나의 적과 더불어.

그래서 이제 내 형제가 내게서 죽어나간다.
내 손으로 그를 학살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가 패하면
나 자신도 패한다는 걸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치 돌격대원의 노래" 중에서

[ 덧붙여서 ]

* 토니 케이라는 이름,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나이키의 광고들을 만든 감독이었다. 소울 어사일럼(Soul Asylum)의 스매쉬 히트 'Runaway Train'의 뮤직 비디오를 부랑자 가족(엄마와 두 아기)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회적 뮤직 비디오'의 걸작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

*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 대한 IMDB의 User Comment 중 한 대목

"내 친구 중 하나는 네오 나치에다 인종차별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그 친구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런 것이야말로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